아직은, 쌍용의 시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FC서울의 홈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유소년 클럽 출신 아들과 함께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찾곤 한다. 어려서부터 유독 말이 없고,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던 아들 녀석이, 서울로 전학을 온 뒤로, 성격이 많이 쾌활해졌다. 축구 때문이다.
날이 좋아도, 날이 좋지 않아도, 날이 적당해도, 우리에게 주말 상암은 상수 값이다.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대화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이다. 30-40분이 금세 지나간다. 축구 얘기는 도무지 끝이 없다. 공부할 때는 유독 흐르지 않는 시간이, 주말 축구장을 오갈 때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일주일에 한 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참 명제다.
오늘의 출전 선수 라인업, 예상 스코어, 키 플레이어, 감독 전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100분 토론 저리 가라다. 우리 둘의 관전 포인트는 전혀 다르다. 나는 스트라이커, 즉, 골에 주목하는 데 반해, 아들은 미드필더, 팀 균형에 집중한다. 결과냐 과정이냐, 언뜻 성향의 차이라고도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축구에 관한 한 아들이 나보다 한 수 위다.
아들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팀의 최후방에서 골문을 지키면서, 필드 플레이어들을 관찰하다 보니, 공격진과 수비진을 조율하는 미드필더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미드필더는 팀의 승리를 도움과 동시에, 팀의 패배도 막는, 팀의 중추다. 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공격수지만, 감독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인정받는 건 미드필더다.
그래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축구선수는 FC서울의 기성용, 그리고 울산 현대의 이청용이다.
양박쌍용(兩朴雙龍)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과 중원을 이루었던 박지성,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선수를 묶어 부르던 말이다. 이들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전력을 갖추었던 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 2010년 월드컵 대표팀의 핵심 멤버들이다. 한때, 세상은 이들을 한국판 <판타스틱 4>라고 치켜세웠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박지성은 은퇴한 지 오래고, 박주영도 선수 생활의 막바지다. 어느새 양박(兩朴)은 전설(傳說)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청용과 기성용 역시, 곧 그들을 이어 전설(Legend) 타이틀을 물려받을 참이었다. 그게 자연의 순리요, 순행자의 행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쌍용의 시대는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약 중이다. 노장, 베테랑, 정신적 지주 같은, 말만 번드르르한 OB(Old Boy)가 아니라, 승부의 추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원의 Key Player로 말이다.
그렇다고, 벤자민 버튼처럼, 그들의 시간만 거꾸로 가는 건 아닐 테다. 자연스러운 운명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역행자라고 보는 게 맞겠다. 쌍용은 지금도 자연의 엔트로피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기 때문이다.
1988년생 미드필더 이청용. 그는 FC서울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2009년 영국 프리미어리그 소속팀인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한국인 7호 프리미어 리거였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활약했다. 그러다, 2011년 리그 개막 전 친선 경기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상대 선수의 태클은 끔찍했다. 친선경기에서는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다분히, 인종차별적이었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었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오래갔고, 회복 후에도 컨디션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 활약이 미약하니, 그가 원치 않는 이적이 이어졌다. 그렇게, 이청용의 시대는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2020년, 고심 끝에 국내행을 결정했다.
당시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축구를 포기하지 않는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어제의 찬사가 오늘의 비난으로 이어지는 게 세상 이치기 때문이다. 세간의 평을 뒤로하고, 홍명보 감독을 만나 다시 몸과 맘을 다잡았다. 2022년, 절치부심한 그는 마침내, K리그 우승을 이끈다. MVP는 팀의 주장이었던 그의 몫이었다.
35세, 축구선수로는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결정적인 순간, 몸에 힘을 빼고, 더 좋은 자리의 동료에게 패스를 건네는 베테랑의 품격은 시즌 내내 빛을 발했다.
어제의 비난을 오늘의 찬사로 바꿔놓는 데 필요한 시간은 2년이었다. 최우수선수 수상 소감을 전하던 중, 그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사람들은 그걸 용의 눈물이라고 불렀다. 쉬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시작은 자의(自意) 반, 타의(他意) 반이더라도, 끝맺음은 온전히 자의(自意) 백(百)이어야 한다.
1989년생 미드필더 기성용. 그도 친구 이청용과 함께 FC서울에서 뛰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사실, 어려서부터 워낙 기량이 출중했다. 20살 무렵에는, 한국 축구 최고의 재능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운명처럼, 친구가 해외로 진출하던 그해(2009년), 그도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구단인 셀틱 FC로 이적했다.
넓은 시야와 정확한 킥, 대포알 같은 슈팅으로 단번에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그에게도 여지없이 시련은 닥쳤다. 오랜 해외 생활로 인한 향수병, 컨디션 저하, 부상 등으로 인해 경기 출장 시간이 줄어들었다. 반등과 기회를 노리며, 스페인 리그에 진출했으나, 부상만 악화됐다.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국내행을 마음먹고, 2020년 예전에 활약하던 FC서울로 돌아왔다.
철없던 시절 갖가지 구설수도 많았다. 주장이었던 기성용은 일찌감치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타이틀보다는, 축구선수 본연의 기량을 회복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 정신적으로도 더 성숙한 듯하다. 그는 복귀 후 지금까지, 상암 구단의 영원한 캡틴, 패스의 달인(Master-piece)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며, 붙박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맹활약 중이다. 상대 팀의 허(虛)를 찌르는 대각선 크로스는 상암 구장의 백미(白眉)다.
그는 친정팀에서 행복 축구를 하며,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닌다. 아닌 게 아니라, 관중석 유니폼의 칠 할은 등번호 6번, 기성용의 몫이다. 이날, 우리 좌석 한 블록 옆에는, 그의 아내인 배우 한혜진과 딸도 구경 와서 목청껏 응원 중이다. 다시 찾은 전성기, 인생은 기성용처럼 이다.
서른 중반, 자신이 팀의 중심이 아니어도 좋다는 마음가짐,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남들 시선에 주눅 들지 않는 뚝심, 마지막 끝맺음은 본인이 결정한다는 자유의지.
그렇게 쌍용은 부활했다. 폼(Form)은 일시적이어도, 클래스(Class)는 영원하다.
금요일 오후 늦은 시간, 사무실 막내인 P 대리와 함께 공용차를 타고, 경기도 평택으로 출발했다. 티맵을 켜보니, 편도 2시간 거리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만 해도 1시간 이상 걸린다. 출장을 마치고 금요일 밤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는 족히 넘을 듯하다. 그래도, 우리의 불타는 금요일 밤은 잠시 유보다. 멀리 평택에서 난생처음 정책금융의 문을 두드린 후,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J 대표가 우선이다.
목적지는 쌍용차 평택 수리센터다. 주말에 쌍용(기성용, 이청용)의 경기를 직관했는데, 얼마 후 또 쌍용 수리센터를 방문하다니, 공교롭다. 나의 다음번 자차 브랜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듯하다.
J 대표는 20년 이상 쌍용자동차에서 차량 수리 전문 기술직으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사를 창업했다. 그로부터 벌써 15년이 흘렀으니, 동 업계 종사경력은 무려 35년이다. 20살 약관의 나이부터 낼모레 60세를 앞둔 오늘까지, 그는 오직 쌍용차만 고치고, 닦으며, 정비 중이다.
본인의 정체성이 곧 쌍용차인 J 대표는, 잠시 쌍용과 이별을 하려고 한다. 평생 처음 맞이하는 헤어짐이다. 쌍용차 간판을 잠시 내리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업장 신축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날이 좋든, 좋지 않던, 적당하든 관계없이, 고장 난 쌍용차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과장 조금 보태, 평택 바닥에서 돌아다니는 쌍용차는 거의 다, 자기가 기름칠했다며, 너스레를 떤다. 허풍이라며, 웃어넘겼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지금 쌍용차의 사정이 좋지 않다던데, 이 동네 쌍용차 터줏대감인 J 대표가 운영하는 수리점이 갑자기 간판을 내리면, 단골인 고객들, 주변 상인, 지나가는 사람, 심지어 도로를 달리는 그랜저/G80/벤츠/페라리 등 외부인(!)들도 놀랄지 모른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 이렇게, 쌍용의 시대는 저물어 가는가.
판을 좀 키워 살펴봐야겠다.
전국 모든 쌍용차 수리점, 대리점들의 뿌리이자 모체인, 쌍용자동차는 1954년 설립됐다. 명색이 우리나라 자동차 기업 중 가장 오래된 회사다. 특이한 건, 쌍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도, 실제 쌍용그룹의 계열사였던 시간은, 그 긴 역사에서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용맹스러운 상호, 오랜 역사와는 다르게, 사실 쌍용자동차의 주인은 계속 바뀌었다. 쌍용그룹(1986~1997), 대우그룹(1998~1999), 채권단(1999~2004), 중국 상하이차(2004)~2010), 인도 마힌드라(2011~2020), KG그룹(2023)까지 최대 주주는 변경되어 왔다.
주인이 자주 바뀐다는 건,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는 증거다. 시작은 1997년 IMF 외환위기였다. 회사가 어려워지는 이유야, 당연히 복합적이다. 특히, 자동차 사업은 국가 기간산업, 장치산업으로도 볼 수 있기에, 넓게는 국가의 장기적인 산업전략, 국민경제 수준, GDP 규모, 경기 변동성 등에서부터, 좁게는 기업의 비전, 경영진의 역량, 기술력, 투자, 인력 등 수많은 이슈가 맞물려 있다.
사달이 벌어지고 나서, 사후적으로 원인을 따지고, 분석하는 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미래에 대한 예측과 대비, 그리고 최악(폐업/부도/청산)으로 치닫지 않도록 위험(Risk)을 관리하는 능력이다.
애석하게도, J 대표의 애정, 노력, 역량, 의지와는 관계없이, 쌍용은 쓰러져갔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서울회생법원 2020 회합 100189>
쌍용자동차에 대한 <기업회생절차 사건번호>다. 대법원 사건 열람을 해 보니, 채권자 수가 무려 395명이나 된다. 대표 채권자로 한국산업은행 이름이 나온다. 대기업 정책금융의 대표 격인 산업은행이 확인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쌍용차의 기존 채무 규모는 어마어마한가 보다.
법원이 회생 계획을 인가하려면 회생담보권자(3/4), 회생채권자(2/3), 주주(1/2)들이 동의해야 한다. 살펴보니, 회생담보권자인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은 100% 찬성, 수백 명의 회생채권자들 95% 찬성, 주주 찬성률 100%로 회생안이 인가됐다.
회생담보권자는 원금 100%를 전액 현금변제를 받는 지위에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 역시, 은행은 웬만해선 손해 볼 일 없다. 문제는 회생채권자들에 대한 변제율이다. 상거래 채권자들은 원금의 14% 정도만 현금변제를 받는 조건이다. 대여금 채권자와 구상채권 보유자의 현금변제율 6.8%에 비하면, 그것도 양반이다. 변제받지 못한 채권은 모두 출자전환*된다.
* 출자전환: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채무자인 기업에 빌려준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해 기업의 부채를 조정하는 방식
회생절차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회의)이 제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의(법)의 이름으로, 선량한 채권자에게 금전적 손해를 감수할 것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야 최악의 결과(파산/청산)를 막는 데 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금력 빵빵한 채권자(은행/회생담보권자)는 마지막까지 손해 안 보는 기본 설계구조가, 애당초 공정성, 형평성, 보편성 같은 '신의칙'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하여튼, 쌍용차도, 회생채권 변제율 문제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채권자가 반발하지 않으랴. 형평성 제기는 자연스러운 디폴트(상수) 값이다. 내 채권을 포기하더라도, 저 대마불사(大馬不死_대기업)를 살려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동의를 요청하려면, 채무자 또는 인수자 측도 더 나은 제안을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쌍용차는 새로운 주인(KG그룹)을 만나, M&A (인수합병)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에 따라 KG그룹이 납부한 인수대금 3,655억 원을 변제 재원으로, 쌍용차는 회생 담보권과 회생채권을 상환했다. 또한, 새 주인은 회사의 정상화를 위해, 추가로 신주를 발행해 총 5,600억 원을 조달하여 공익 채권을 상환하고, 회사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임을 제출했다.
2020년 12월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한 쌍용차는, 이로써 1년 10개월 만인 2022년 11월 법정 관리를 졸업했다. 쓰러졌던 쌍용이, 거짓말처럼 정상기업으로 기사회생했다.
또 다른 쌍용의 부활이다. 물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난관은 한둘이 아닐 거다. 도전할 과제들도 산적해 있다. 채권자들도 이렇게 된 이상, 쌍용차와의 상생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쌍용차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잘 모른다. 아니, 벌써부터 틀렸다. 쌍용자동차라는 회사명은 이미 사라졌다. KG 모빌리티다. 아직 입에 잘 붙지는 않지만, 상호(Naming)가 현대적(Modern)이고, 미래지향적인 느낌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썩 괜찮아 보인다.
내가 이렇게 긍정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건, 쌍용차를 소유해 본 적도, 운전해 본 적도, 쌍용차에 돈을 빌려준 적도, 무엇보다 고장 난 차를 직접 수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추억이 있어야, 감정적인 접근이 가능한 법이다. 관심이라 해 봐야, 최근 거래 재개된 KG 모빌리티의 주가(시세) 정도 되려나.
그러나, J 대표를 만난 이후로는 심경이 복잡하다. 그가 35년간 매일 작업장에서 걸치고 있던 쌍용 유니폼 점퍼, 수리용 공구마다 아로새겨진 쌍용 마크, 대표로서 자부심이었던 쌍용차 입간판과도 곧 이별해야 한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과거를 떠나야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아이러니한 지금의 상황에 절로 감정이 이입된다.
하필, 쌍용차가 이름이 바뀌어 한국거래소에 재상장되는 시점에, J 대표가 운영 중인 <쌍용차 평택 수리센터>는 잠시 간판을 내린다. 운명의 장난 같다. 그런데, 어쩌면 남들 눈에는, 시대의 변화에 먼저 적응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비칠 수도 있겠다. 행여 재상장 기업의 새로운 도약에 안성맞춤인 표지모델로 발탁될지도 모를 일이다.
일견, J 대표의 행보는 모기업의 철학에 잘 부합하는 모양새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에 과감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이번의 (최대 주주) 교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오래된 현 사업장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 틀 예정이다.
이미, 새로 산 부지의 기반 공사가 한창이다. 큰돈을 들여, 초입에 쭉 뻗은 길도 새로 내고 있다. 땅을 잘 다지고 나면, 철근콘크리트로 기초공사를 튼튼히 해, 세찬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물을 올릴 예정이다.
다행히, 은행도, 건축사 사무실도, 시행 건설사도, 관공서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 J에게 협조적이다. 그가 35년 동안 쌍용 이름 내걸고, 잘 살아왔다는 증거다. 한 곳에 터 잡아 15년 꾸준히 사업을 할 수 있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과거는, 어쩌면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난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결국 순조롭게 마무리된, 모기업 쌍용의 회생절차 과정과도 닮아 있다.
J 대표의 이번 자가 사업장 신축사업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일생일대의 투자임과 동시에, 온고지신(溫故知新) 프로젝트기도 하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다고 해서, 본인의 자랑스러운 정체성과 흔적들마저 섣불리 버릴 필요는 없다. 지난 3년간 내가 먹은 음식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나 자신이라 하지 않던가.
J는, 그래서 이사를 가더라도, 가급적 오랫동안, 기존의 유니폼, 공기구, 비품을 그대로 사용할 계획이란다. 35년 기술장인의 애환과 추억이 장비 하나하나에 켜켜이 쌓여 있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다.
강제로 교체되지 않는 한, <쌍용차 수리점>이라는 간판과 상호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비단, 평택의 J뿐 이겠는가. 전국 각지에서 십수 년 동안 <쌍용차 OO 수리점>을 운영 중인 ‘원조 풀뿌리’ 쌍용맨들도 그럴 테다. 그들이 기존 간판을 내걸고 꾸준히 사업할 수 있게 되면, 모기업 상호마저 다시 원래대로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다.
새 땅, 새 건물, 새 공구여도, 그들이 맞이하는 손님은 여전히, 예의 그 쌍용차기 때문이다. 확실히, 쌍용은 버리긴 아까운 이름이다. 용 두 마리가 만나면, 하늘로 승천할 일만 남는다. 아직, 쌍용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