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도 당하는 건 사기가 아니다
사기의 정석,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은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뜻한다. 우리에겐 1999년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리플리>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원래 리플리는 미국의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쓴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의 주인공이다. 반항아적 기질의 리플리는 친구이자 재벌가 아들인 그린리프를 죽인 뒤, 대담한 거짓말과 행동으로, 본인이 아닌 그린리프의 인생을 살아간다. 나중에 그린리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그의 연극이 막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리플리 증후군은 거짓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히 진실로 믿는 경우 쓰인다. 여전히 이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리플리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기야, 영화나 드라마도 현실 세계를 모티프로 하여 제작되는 거니까,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발생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 일은 나에게도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첫 대면부터 심상치 않았다. J는 유난히 다정한 말투, 선량한 미소, 밝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게는, 긴장한 나머지 잘 아는 내용도 버벅거리며 실수하기 마련인데, J는 유독 거침이 없었다.
J는 얼마 전 발매했다는 CD를 보여줬다. 정규 앨범 제작, 후배 가수 양성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혹시나 몰라 여유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하니, 마이너스통장대출을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보란 듯이 기타를 둘러메고, 자신이 제작한 음반을 들고 나타난 뮤지션 겸 연예기획사 대표를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특이한 건, 그가 오랜 기간 미국, 일본, 호주 등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얼마 전에야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점, 한국어가 서투르다며 말하는 중간중간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쓴다는 점 정도였다. 가끔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제스처, 말투는 처음부터 계획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계획은 딱 맞아떨어졌다. 유학파 출신 싱어송라이터를 바라보는 나의 존경 어린 눈빛을 그는, 단번에 간파했다. 처음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는 분들은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게 일반적인데, 그는 달랐다. 사무실을 쭉 스캔하다가, 자기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다가왔다. 모든 건 본인 시나리오대로였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예비창업자, 그중에서도 문화 예술인 들에 대해서 특별히 우대하는 제도가 도입된 초기였다. 하필, 그가 방문한 시기도 우리 지점의 해당 부문 실적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운영하려는 회사의 청사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섣부른 결정을 내릴 순 없는 일이다. 그는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를 꺼내 들었다. 이후의 브리핑은 그와 함께 방문한, 한국어가 유창한 여자친구 겸 매니저의 몫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자기와 곧 결혼할 여자라며, 미스코리아 출신, 라디오 DJ 출신이라는 그녀의 약력을 소개한다. 자기는 이렇게 실력과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니, 믿어달라는 신호다. 내가 네이버에 그녀까지 검색하진 않을 거란 점도 예측했었나 보다. 역시나 그녀의 존재는 나의 눈과 귀를 가리는 데, 한 몫 담당했다.
정책금융은 의심을 지워가는 과정이다. 자칫하다간, 공적 자금이 엉뚱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를 막는 게 디폴트값(최우선)이다. 상시적인 민원 발생의 우려가 있어도, 면담과 신용평가를 진행하면서, 의심되는 부분은 계속 묻고, 검증해야 한다.
물론, 작정하고 속이는 자를 잡아내기란 어렵다. 시쳇말로, 경찰 있다고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검찰과 법원이 있다고 강력범죄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다. 신용평가 전문가, 정책금융 전문가가 있다고 해서 금융 사기, 부실을 전부 막을 수는 없다.
J는 나와 L을 본인 음악 작업실로 초대했다. 업무 담당자로 배정된 건 같은 팀 L 대리였는데, 내가 자처해 동행했다. L 대리의 사수였다는 건 핑계다. 실은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심이 작용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J는 우리를 관객 삼아, 30분 동안 콘서트를 열었다. 혼자 노래와 연주를 다 한 건 물론이다. 자작곡, 팝송, 가요에 이르기까지, (내 눈에는) 10점 만점에 10점짜리 더할 나위 없는 공연이었다.
이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아이돌 위주의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자신의 포부를 설명했다.
제2의 김광석, 동물원 같은 훌륭한 포크 음악인을 키우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트로트 가수를 양성해 전통가요 붐을 일으키고 싶다는 남다른 계획도 드러냈다.
기대 반, 의심 반이었던 관객 2인은 그의 정성과 준비에 깊이 감동했다. 이내, 우리의 도움이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자리 잡는데 작은 밀알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덕담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금리가 가장 저렴한 OO 은행을 소개해 주고, 그 은행 과장에게 특별히 최저 금리로 잘 검토해 달라는 부탁의 말까지 남겨 두었다. 과도한 친절과 배려가 독이 될 수 있음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찜찜했던 게 없었던 건 아니다. 아무래도, 그의 약력, 지난 과거가 마음에 걸렸다. 40대에 이른 그의 인생이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무슨 검찰 수사관도 아니고,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귀국해, K-pop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겠다는 음악인 겸 법인기업 대표이사에 대해,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보고, 듣고, 생각한 대로 결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의 요청대로 의사결정이 났다. J가 약정을 체결하러 사무실을 다시 방문한 날, 지점장님도 그의 건투를 빌어주었다. 빠른 의사결정과 친절한 응대에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숙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아름다운 작별을 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J로부터 문자가 왔다. 내가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조금, 이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게 비정상 아닌가. 심지어 나는 이미, 그가 어디에 사는지, 언제 개명했는지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래도 내가 먼저 사적으로 연락할 순 없는 일이었다. 공과 사 구별은 하면서 살아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안부가 궁금하던 차에, 그가 먼저 연락을 주다니,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었다.
편하게 식사나 한 끼 하자는 연락이었다. 내가 피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으니, 따로 연락이 왔을 터였다. 유독, 본인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던 나를 간파했던 거다. 고민 끝에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확증 편향! 내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별일 없을 거다, 한국에 나 같은 친구(동생) 하나 두어도 나쁠 건 없을 거다, 만나더라도 밥과 술은 내가 사면 된다, 등등. 만남을 위한 핑곗거리는 많았다.
J는 얼마 전 매니저 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쓴 소주를 한 잔 기울였다. 지난번 사무실에 동행했던 그 사람을 말하는 거냐는 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이제 운전 실력이 더 좋은 매니저 구하고, 꿈을 응원해 줄 사람 만나면 되지 않겠느냐며, 그를 위로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J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녀가 돈 몇천만 원을 빌려 갔는데, 그 후로 연락이 잘 안 됐고, 결국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굳이 안 해도 될 이야기, 사적인 부분까지 털어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말해주다니, 나는 그저 고마웠다.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술 한잔했다고, 정신 줄을 놓지도 않았다. 애매하게 엮였다가는 내 신상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은 진즉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밥값과 술값은 내 몫이었다. 물론, 그도 그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후로도 종종 연락이 왔다. 오늘은 무슨 방송국에 가서 어떤 PD를 만났다느니, 누구의 장례식장 가서 유명 가수 L과 인사를 나누었다느니, 모 케이블 방송사로부터 올해의 음악인상 후보로 올랐다느니, 포크그룹 출신 K와 듀엣곡을 만들었는데, 대박이라며 한 번 들으러 오라느니, 음악인으로서의 광폭 행보를, 그는 굳이 나에게 보고했다. 물론, 확인된 사실은 없다.
J에게는 유독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생겼다. 새로 구한 매니저가 방송국 사람들에게 접대(?) 해야 한다며 돈을 가져갔는데 그 후로 연락이 안 된다는 이야기,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직접 운전대를 잡았는데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났다는 이야기 등 여러 일들이 물 샐 틈 없이 이어졌다. 이쯤 되면, 누구나 진정성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어찌 하나같이 안 좋은 일들만 계속 일어난단 말인가.
그러나, 거짓말이 탄로 난 건 아니었다. 몰래 그가 입원했다는 병원에 가봤더니, 실제로 그가 목 깁스를 한 채 누워 있었다. 얼른 쾌유하라는 덕담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픈 사람을 의심하는 순간, 나는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냉혈한이 되는 거다. 그에 대한 의심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사고 상대방은 70대의 노인이었는데, 사정이 딱했고, 본인의 과실이 컸기에 얼른 보상 합의를 해줬다고 한다. 그가 지급해 준 금액은 무려 수천만 원, 속전속결이었다. 어르신에 대한 예의였다는 설명이다. 앨범 제작비, 방송국 홍보비에 교통사고 보상금까지 주고 나니, 수중에 돈이 다 떨어졌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본론은 이제부터였다. 평소에 내가 음악에 관심 많고, 목소리 톤도 괜찮은 거 같으니, 기념앨범 한 곡 갖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러려면, 녹음 장비도 다시 세팅하고, 오래된 키보드와 마이크도 바꿔야 하는데, 아무래도 돈이 부족하다고도 했다. 나를 위한 프로젝트뿐 아니라, 지금 키우고 있는 트로트 가수를 위해서라도 스튜디오 재정비는 필수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사람을 바보로 보는 게 확실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정도다. 저런 말에 속는 사람이 다 있느냐고? 그렇다. 당시 난 그에게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J 대변인이 따로 없다. 그다음엔, 내 오래된 꿈 타령이 이어진다. 예전부터, 내가 만든 노랫말에 내 목소리를 담은 싱글앨범 한 곡 갖는 게 인생 버킷리스트라고,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냐며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J가 말한 제작비는 3백만 원이었다. 차마,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백만 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꿈을 이룸과 동시에, 신세 딱한(?) 음악인 한 명도 도와줄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기회라는 나의 말에, 아내는 속아 넘어갔다. 실은, 속는 셈 치고 날 내버려 둔 거다. 본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간, 나를 위해 겨우 1백만 원도 플렉스(Flex) 못할 정도냐고, 내가 되려 큰 소리 낼 게 뻔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핸드폰에는 J가 작곡/연주하고, 내가 작사/노래한 곡 하나가 저장되어 있다. 누가 이 노래를 듣는다고 상상하면, 자다가도 이불 킥일 만큼 민망하고, 조악한 수준이다. 무려 3백만 원짜리 곡을 만들고, 녹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나절이었다. 시급으로 환산하면, 전관 출신 변호사 저리 가라 할 수준이다.
큰아들 삼겹살 사주겠다며 시간 외 근무(야근)도 마다하지 않던 아빠라는 작자가, 눈이 제대로 멀었던 거다. 창작에 대한 대가로, 3백만 원도 저렴하다는, 이상한 셈법이었다.
희한하게도 당시엔 그 음악이 참 좋게 들렸었다. 남는 게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은 계속된다는 노랫말은 내 삶을 관통하는 주제어가 되었다. 무모한 도전이 꼭 부정적인 결과만 낳는 건 아니다.
얼마 후, J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틈새시장인 부산을 공략하겠다는 심산이라 했다. 가자마자 부산 밤무대를 접수했고, 중년층의 반응은 이미 뜨겁다며 너스레를 떤다. 러시아(?!) 출신 신인 트로트 가수를 키우고 있는데, 한국어 발음만 조금 좋아지면, 전국노래자랑 1등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도 했다.
분명, 포크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했는데, 그는 어느새 밤무대 트로트 가수가 되어 있었다. 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나의 요청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거절당했다.
이젠, 내게 예전에 했던 말들도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한다. 몇 개월만 지나면 서울에서 날린 돈은 다 회수될 거라며, 돈 벌면 부산에 멋진 카페도 하나 열 테니, 그땐 꼭 놀러 오라는 말에는 진정성이 1도 없다.
목소리로 전달되는 그의 말은 허무맹랑함의 연속이었다. 역시 한 발치 떨어져서 봐야 잘 보인다. 잠시 길을 잃었던 내 정신도 이제야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하지만, 웃는 낯에 침을 뱉을 순 없다. 전화로 막말을 퍼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히, 그의 미래를 응원하는 심정도 완전히 빛바래지는 않았었다. 부디 잘 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J는 내게 마지막 부탁이 있다고 말했다. 오래된 일본 팬들이 자기를 오사카로 초대했다며, 돌아오면 갚을 테니, 오사카행 비행기 삯을 빌려 달라는 거였다.
30대 시절의 난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는 편이었고, 선의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호기롭게, 비행기 요금은 내 여행 선물이라 생각하고, 오래간만에 팬들과 좋은 시간 보내라며 멋있는 척을 했다. 이에 질 새라, 그도 그럴 수는 없다며, 신세는 잊지 않고 꼭 갚겠다는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8년이 지났다. 물론, J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는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고, 그의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도 빈 페이지다.
그의 안부가 궁금할 땐 유튜브에 접속해 총제작비 5백만 원의 뮤직비디오를 열어보면 된다. 8년째, 조회수는 거의 나 혼자 올리고 있다.
그가 떠난 6개월 뒤, L 대리의 팩스로 OO 은행의 통지서가 한 장 들어왔다. J가 운영하던 법인의 원금 연체 통지서였다. J가 한국에 남겨 놓고 간 마지막 흔적이다.
때 이른 통지서가 직장인(금융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 J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꼭 그렇게 떠나야만 속이 후련하냐고 묻고 싶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J는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그는 바람 같은 존재였다. 날 울려 놓고 가는 바람, 가끔, 유령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현실 속에 실존 인물이었다. 나 혼자 외면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굳이 멋있게 포장하자면,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자신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닌, 국제인이라고 소개했던 것도 같다.
40대 초반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 그의 삶은 비교적 투명하게 확인이 된다. 싱글 앨범 2장, 유명 포크그룹 출신 가수와의 협연 그리고 뮤직비디오, 지역 행사와 라디오 출연 등은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과거 20년간의 행적이 묘연했다. 그가 직접 전해준 이야기, 인터넷 언론사와의 인터뷰 등을 토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리플리 저리 가라다. 기사화된 적도 있는 J의 인생은 다음과 같다.
-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답답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등학교 때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무난히 의대에 진학했다. 장학생이어서 학비 걱정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생활비에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틈틈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중엔 음악도 있었다.
기타와 피아노는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작곡한 노래를 주변에 팔았고, 보컬, 기타, 작곡 레슨으로 용돈도 벌었다. 의대를 졸업할 즈음, 아무래도 의사는 제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자퇴했다.
다행히, 평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의대를 자퇴한 뒤에는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에 입사했다. 몇 년을 다니다가, 부모님도 보고 싶고, 고국 생각이 많이 나서 30대 중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번 돈은 모두 부모님과 누이들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이번엔, 일본으로 떠났다.
틈날 때마다 일본어 공부를 해두었기에 의사소통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한국어나 영어보다 일본어가 더 편하다. 일본에서는, 가수로 활동했는데, NHK PD에게 발탁되어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도 몇 년 일했다. 한국 가수들이 일본 공연을 오면 공연 기획 및 스케줄 관리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의 대중음악인들과 교류하다 보니, 한국에서 활동하는 게 나을 듯하여 귀국했다 -
지금 보니,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삶이다. 그런데 당시엔 정말 대단한 도전의 연속, 앞으로 뭘 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 이라고만 생각했다. 의심은커녕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알고 보니, 언론사 보도자료도 모두 J가 스스로 작성한 내용이었다. 아직도 난, 그의 인생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모르겠다.
내 맘속에서 J를 지우는 건, 사실 과거의 나와 이별하는 일과 다름없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확증 편향성, 인지부조화로부터 벗어나는 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 객관화(메타 인지)는 영영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된통 당한 것 같지만, 그래도 치명상은 아니었다. 주식투자로 한두 달 만에 수천만 원을 날렸어도, 멘털만큼은 금세 회복했던 나였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그로 말미암은 투자금 수백만 원 정도야, 전에 비하면 적은 수업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이 업무에 개입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편견에 눈과 귀가 가려지는 순간, 프로로서 자격 상실이다. 그로 인한 결과도 명약관화(明若觀火)다. 자칫하다간 개인의 경력도 회복불능이다.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물론, 알면서도 당하는 건 사기가 아니다. 리플리는 살짝 부는 바람에도 쉬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같은 우리네 마음의 빈틈을 교묘히 파고들어 온다. 작정하고 덤비는 자를 당해낼 재간은 없다. 그러니,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르고 당한다고 해서 책임을 면하는 것도 아니다. 실수와 실책이 있는 한,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
J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복잡하다. 복수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비심이 발휘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범죄스릴러 영화의 결말은 권선징악이어야 제맛이라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치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부자가 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만은, 정말이지 반대다.
갖가지 방식의 보이스 피싱, 문자사기가 극성이다. 리플리의 변형이다. 남들이 당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고, 왜 저런 일에 속나 싶겠지만, 본래 남의 눈에 티끌은 보여도,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법이다.
세상은 넓고, 리플리는 많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실수를 경험하고 나서야 배우고 성장하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 호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를 반면교사 삼아, 부디 당신만큼은 당신의 인생 안으로 훅 들어오려는 리플리를 잘 거를 수 있는 선구안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