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선도 악도, 그저 붉은빛일 뿐이다.

by 임요세프

삶은 타인과의 관계를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흔히들 인생은 오해를 이해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칠십억 명 모두 각자의 양식(Style)이 있을지 언대, 애초에 다른 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나마,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주변인들에게는 최소한의 '이해'를 구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나와는 별 관계없는 외부인들에게조차 억지스레 에너지를 쏟아가며 '오해'를 풀 필요는 없다. 오해가 오해를 낳을 뿐이다.


바야흐로, 개성의 시대, 지지율 40%만 나와도 성공적인 정권이란 소리를 듣는 시대 아니겠는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에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나를 공격하려고 오는 늑대인지, 내가 기르는 개인지 분간이 어렵다. 이렇듯, 그림자가 질 때 상대방이 나의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을 두고,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은 프랑스어인 <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무렵을 황혼(黃昏)이라고 한다. 사람의 생애가 전성기, 성숙기를 지나가면, 황혼기라고 하는데, 달리 해석하자면, 생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나이 든 사람이 과연 나에게 좋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해 질 녘에는 모든 선도, 악도 그저 붉은빛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니어 창업가 C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꼭 그러했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지난 몇 개월의 시간, C를 향한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한참 시간이 지났어도, 그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렵다.

하긴, 그도 처음엔 나를 '늑대'로 간주했을지 모른다. 내가 불친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C 대표는 (내가 듣기에는) 통성명하기 무섭게,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요청했다. 마치, 싸우자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맡겨놓은 돈 찾는 사람 같았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지만, 평소에 난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더구나, 화를 삭이기 위해 통화를 조기 종료했는데도 두 번, 세 번 계속 전화가 걸려 오면, 내가 당해낼 재간은 없다. 감정노동자라고 해서, 언제나 무턱대고, 반가운 미소와 상냥한 말투로 모든 고객을 대할 수는 없다.


물론, 불쾌한 끝맺음은 후회를 남기기 마련이다. 더구나, 연장자임이 확실한 상대방, 그것도 한 기업의 CEO와 통화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내 감정을 드러내는 건, 누가 봐도 경솔한 일, 혹은 겸손하지 못한 일이다. 겸손은 힘들다.


찜찜하게 통화를 끝내고 나면,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거 혹시 민원으로 연결되는 것 아닌가,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VOC: Voice Of Customer)에 올라가는 것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 우선 든다. 참 간사한 직장인의 모습이다. 그렇다. 결국, 참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우려하던 일은 여지없이 벌어졌다. 공식적인 민원 제기만 하지 않았을 뿐, C 대표는 30년에 이르는 사회경력, 그것도 대기업 고위직 출신이라는 본인의 인맥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분임을 진즉에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얼마 후 C 대표의 오래된 친구라는 L 부장님, 전임자였던 Y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사람은 달라도, 하는 말은 모두 일맥상통했다. 친절, 경청, 적극, 신속, 지원, 검토다.


물론, 부정 청탁은 아니다. 서로 알만한 사람들끼리, 함부로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한다. 대부분 직장 선배, 그리고 동료들은 선하다. 그리고 대게는 소심하다. 오래된 친구의 요청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 못할 뿐이다.


C 대표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고, 열심히 사업하는 시니어 창업가이니, 오해를 풀라며 조심스레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안 그래도, 바로 전화를 걸어 C 대표에게 먼저 사과할 요량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번 전화를 청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는 붙임말 역시 빼놓지는 않았다.

작년, 재작년에는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 만족도) 우수직원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올해는 졸지에 불친절 직원 후보로 지위가 격하될 상황이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더니, 역시 중요한 건 첫인상, 첫 통화였다. 이렇듯, 한 사람에 대한 극과 극 평가도 백지 한 장 차이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이해를 얻으며 사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세평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함부로 누군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고,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아닌, 눈빛 교환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대면에는 차분한 톤(Tone)과 매너(Manner)가 디폴트 값으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C 대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은 직접 만나야 한다.




C는 화학 원료와 화학제품을 만드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에서 30년간 근무했다. 50대 후반 부서장으로 명예퇴직한 후에는, 1차 협력사에서 임원(부사장)을 역임했고, 나이 예순에 1인 법인을 창업한 시니어 창업가다. 그의 경력, 전문성을 인정했기에 예전 우리 회사 담당자는, 당연히 친절했고, 그의 요청을 수용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덕분에, 그는 대기업으로부터 합성수지 원재료를 무사히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별 특이사항이 없는 한 다음 해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었나 보다. 그러나, 인사이동으로 담당자가 교체되자, 지레 본인의 계획이 어긋났다고 판단, 짜증이 났고, 애먼 내가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던 거다. 하필, 그게 월요일 오전, 정식 업무시간이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그도 나도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했을 터였다.

C는 폴리에틸렌(합성수지) 도매업을 주력사업으로 영위 중이다. 폴리에틸렌은 필름, 생활용품, 포장재 등 각종 화학제품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어 상품 종류가 다양하고, 고객군도 넓다. 그는 대기업에 근무할 당시 기술 영업을 오래 담당한지라, 인맥이 넓었고, 화학공학을 전공해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다행히, 초기 고객확보에 큰 어려움 이 없었고, 법인설립 첫해에 10억 원, 이듬해에 40억 원 이상의 매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모기업(대기업)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이차 전지 관련 제품 개발도 병행 중이다. 해당 품목이 매출로 이어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하고, 올해는 주력 품목인 기능성 소재 매출이 늘어나야 예년 수준 이상으로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모기업으로부터 색다른 원료를 구매하기 위해선, 상거래 여신 한도를 증액해야 했다. 그가 다시 우리 회사를 방문한 이유다. 대기업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한다. 상대방이 전임 부서장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신용거래라는 멋진 표현은, 그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의 향연에 불과했다. 현실에서는 구매량에 걸맞은 담보를 제공해야 한다.




두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첫 번째, 자그마치 올해 예상 매출액이 60억 이상인 법인인데도, 회사 직원은 대표이사 1인이 전부라는 점이다. 그는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라고 설명했다. 작년 한 해 직원 1인당 매출액은 40억 원, 올해 목표는 60억 원이다. 여기에 더해, 작년 한 해 순이익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당분간은 직원을 충원할 계획이 없다는 설명이다. 추가 고용 계획이 있는 기업에 대한 우대 지원이 우리의 기본 방침이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하긴, 그가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업가라는 점은 명확했다. 번듯한 사무실은커녕, 공유 오피스를 재임대해 사용 중이다. 월세가 아니라 연세를 내는데, 비용은 10만 원 수준이다. 게다가, IT 활용 능력이 뛰어난 이공계 출신인지라, ERP(전사적 자원관리_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시스템도 잘 활용하고 있다. 생산, 물류, 재무, 회계, 영업과 구매, 재고 등 경영 활동 전반의 프로세스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데도 능숙했다. 아직 영업에도 자신 있었다. 이 정도면, 추가 고용은 시기상조라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두 번째, 올해 1/4분기 매출액이 작년 1/4분기 대비 30% 이상 하락세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올해 매출액은 기대 이하일 것으로 예상됐다. 인플레이션도 심하고, 전반적으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은 하반기부터 거래처도 증가하고, 매출도 늘어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그와의 2차전이다. 티격태격하는 건 숙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1~2개월 더 영업활동을 지켜보고, 신규 거래처가 늘어나는지, 아니면 기존 거래처에 대한 매출액이 증가하는지 확인하겠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정중했던 건 잠시, 다시 예의 까탈스럽고, 예민한 그의 스타일이 되살아났다. 그렇다고, 나까지 예전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할 순 없는 일. 냉정하게, 하지만, 신속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그의 법인에 대한 신용평가를 우선 실시했다. 당연히, 작년보다 더 나아질 기미는 없다.


밤늦게 C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영업 계획, 생산 수량, 예상 매출처, 월 예상 매입금 관련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열과 성을 다한다고 느꼈는지, C 대표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도 주말 내내 나에게 제출할 리포트를 작성하겠단다. 월요일 아침, 이메일을 열어보니 전날 밤늦게 그가 보낸 PPT 자료가 도착해 있다.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한층 이해되기 시작했다. 웬만한 현금부자가 아니고선, 거래처에 7~8억 원을 현금으로 담보 제공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도, 한낱 샐러리맨일 뿐이었다. 게다가, 거주주택은 이미 모기업에 담보제공되어 있었고, 우선순위 주택담보대출까지 고려하면, 추가 담보 여력은 적었다.


30년 직장생활 최종 결과치인 서울 마포구의 아파트 1채는, 그의 모든 재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소유자는 그의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아이 둘을 잘 키워주고, 성격 급한 남편이랑 수십 년 살아준 데 대한 선물이었다.


누군가에게 부동산담보제공하기 위해선 소유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아마, 시니어 창업가 C는, 아내에게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한 듯하다. 또한, 그는 아직 취업 준비 중인 대학 졸업생을 포함한 두 자녀의 가장이기도 하다. 이미 회갑이지만, 그는 여전히 경제적 부양의 책임감이 크다.

은퇴는 시기상조였다. 또한, 창업 후 실패란 상상 불가한 일이다. C는 악착같이 버텨 10년 이상 사업소득을 창출해야 하는, 사실상의 생계형! 창업가였던 거다. 그에게 1인 기업, ERP 시스템 구축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인구 고령화와 소득 불평등이 날로 강화되는 추세다. 인구 고령화는 노동생산성 저하, 노령인구 부양 부담 등을 통해 장기적으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구구조 변화는 우리 가계의 소득 불평등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는 2000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7%를 넘어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2018년 고령사회에 진입했고(14%),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로 들어설 전망이다(20%).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도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 1990년 이후 소득불평등도 증가세인데, 특히 60대 이상 고령층 내 가구 간 소득양극화가 다른 연령층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준이다.

출산율은 1990년 1.57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급격히 떨어진 반면, 의료기술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1990년 71.7세에서 2022년 84.1세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통계청의 가계 동향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고령층의 소득 지니계수는 가파르게 상승 중인 것으로 나타난다. 고령층 내 소득 불평등은퇴에 따른 근로소득, 사업소득 격차 확대에 기인한다.

고령층의 창업은 무수익, 영세업자 비중이 크고, 창업 대비 폐업률도 여타 연령층 대비 높은 수준이다. 2010년 이후 청년층 취업난 등으로 부모로부터 자녀에 대한 지원(사적 이전 지출)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 것도 문제다. 따라서, 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정부와 공공부문은 재교육 프로그램 및 일자리 연계 인프라 확충 등 제도적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 차원의 제도적 뒷받침과는 별개로, 고군분투하는 시니어 창업가의 노력과 실행력은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C 대표가 기획 중인 신규 아이템은 베트남에 수출할 기능성 소재다. 이제, 그는 명색이 수출기업, 1인당 매출액 50억 이상인, 고효율 중소기업의 CEO 겸 영업사원 겸 기술 인력 겸 가장이다. 그를 돕지 않을 이유는 없다.


더구나, 통계적으로도 해당 금융상품의 부실률(부도율)은 최저 수준이다. 판매처로부터 대금을 결제받아 상품 구매처에 지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라도 있을 매출채권 회수 불능에 대비해, 보험에도 가입 중이다. 신규 거래처가 생기면, 일단 보험에 가입하고 있으니,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그와의 첫 통화 후 2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신규 거래처도 몇 군데 더 확보했고, 지난달 대비 매출액도 소폭 증가했다. 돌다리를 두드리며 가는데도, 꾸준히 전진하는 C의 스타일이 확인된다, 이제 그의 요청을 수용할 때다.


증권을 발급하기 전, 나름의 사과하는 마음을 담아 금융비용을 추가로 절감해 드렸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보낸 영수증 팩스를 보면, 마이너스 요율 적용한 게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기에 비용 문제에 민감한 그가 당연히 확인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심전심, 딱 그 정도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 영수증이 안 들어온다며 C의 목소리가 또 높아졌다. 이번엔, 영수증을 이메일로 전송해 달라는 요청이다. 보안 문제로, 팩스 재전송했으니 확인해 보라고 얘기했는데도, 다시 본인 위주다. 하여튼, C 대표는 전투력이 막강한, 아니, 열정이 뜨거운 사람임이 틀림없다.

상대방을 대하는 스타일을 보아하니 영업에 마이너스가 될 것 같긴 한데, 그것도 상대적이니깐 편견은 갖지 않기로 했다. 영수증을 제출하면 모기업으로부터 비용 보조도 받고, 영업 외 비용으로 처리도 가능하기에 민감한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 그저 그의 디테일을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


수개월 후, 다른 지점에 근무하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C 대표가 다른 상품 가입을 진행하면서, 본인이 요청한 시간 내에 상품 설계가 안 되었다며, 전화로 입사 저 연차인 담당자를 울게 했다는 전언이었다. 늘 전화가 문제다.

C는 아무래도 우리 회사의 보통 사람들과는 MBTI가 잘 안 맞는 스타일인 듯하다. 한편으로는, 나의 평범함(!)이 입증된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시 그에게 전화해서 왜 그러시냐고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사는 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오해는 계속된다.


그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황혼은 본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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