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던 40대 중반의 남성이 있다.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한 경력이다. 명문대 졸업, 경영학 분야 최고의 전문 자격증 취득, 대기업 취업, 미국 주재원 근무에 빠른 승진까지. 탄탄대로다. 게다가, 그 힘들다는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계속 회사에 남았더라면, 임원 승진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K 본인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간 열심히 살아온 모범생인 건 본인도 인정.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영락없는 대기업 엘리트 직장인이 어울리는 인상이지만, 말투에서는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 그리고 강단이 느껴졌다. 연수를 가게 된 아내와 함께 미국에 와서 살다 보니, 넓은 세상으로 한 발 나아가고 싶다는 오래된 꿈이 한층 강하게 다가왔다. 때마침, 같은 과 동기인 친구로부터 동업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바야흐로, 인생 2막의 시작이다.
대기업 임원의 꿈을 안 꿔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과 쓸개 다 내놓고, 조직 내 경쟁자들의 등 뒤에 비수를 꽂아가며까지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각오라면, 내 사업을 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라는 아내의 지지 선언까지 얻어 냈으니, 더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마흔 중반, K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역시나, 모두가 만류했다. 그동안 잘 살아왔다는 증거라 생각하니 만족스럽다. 사직서가 아닌 출사표라는 그의 말을 들은 동료, 선후배들의 응원이 잇따른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좋은 기운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창업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K는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 수개월을 고민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의자(Chair)였다. 그러고 보니, 최고 경영자(Chairman)가 되는 길은 참 단순하기도 하다. 본인 회사를 설립해 CEO 의자에 앉으면 해결될 일이다. 물론, 그가 그런 이유로 의자(Chair)를 선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구산업은 가격에 민감한 가치소비와 감성 중심의 프리미엄 시장이 공존하는 묘한 산업이다. 휴식을 중요시하는 분위기, 개인의 다양한 기호를 반영한 디자인과 기능성, 소득 수준의 향상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난 사무용 의자, 게임용 의자를 만들어 낮은 가격에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동업자 L이 대학 졸업 후 20년간 무역업, 해운 운송업체 등을 운영한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자, 중국 전문가라는 점까지 고려한 의사결정이었다.
K는 의자 도소매업, 수출입업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을 설립했다. 그사이 L은 인맥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중국 상해와 광저우에 생산공장을 섭외했다. 중국에서 의자를 만든 후, 아마존을 통해 미국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간결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G1, G2 국가는 전 세계 N0.1 자리를 놓고, 주도권(Hegemony) 싸움을 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과 중국은 공생(共生)할 운명이다. 어느 나라, 어느 정부든 간에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앞 순위에 두고 외교활동을 한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하더라도, 중국에서 만든 의자는 미국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K는 디자인으로 특화된 국내 대학교와 산학 협력을 맺고,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았다. 남들에게 잘해주며 살아왔더니,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 벗고 나서 도움을 줬다.
수개월의 시행착오 끝에,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의자가 탄생했다. 중국 공장의 노동력, 생산시설을 활용했더니 원가절감도 됐다. 유명 가구업체 제품 대비 20% 이상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 판매가 책정이 가능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마존 사이트에 올려놓고, 폭주하는 주문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계획한 대로 술술 풀리기만 한다면, 그게 어떻게 인생이겠는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間隙)을 경험하고,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K. 별다른 성과 없이 무려 2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왜 나왔을까 하는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가장으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돌아갈 길은 불태우고 난 후였다.
2년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시간이기도 했다. 전 세계 최고의 밀림!, 기업들의 각축장, 아마존(Amazon)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기업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과감하게 외부 자원을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거래비용 이론이다. 주변을 수소문해 아마존 온라인 마케팅 경력이 있는 직원을 스카우트했다. 능력 있는 직원에 대한 처우는 남달라야 한다. K는 본인의 주식 지분도 과감히 양도하고, 능력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색다른 한 끗 차이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아마존 밀림 속 경쟁은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기 때문이다. 과감한 아이디어를 내면 “그게 가능하겠어?”라고 대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래, 좋은 생각이네, 한번 해 보자!”라고 답한다. K는 그런 리더였다.
게임용 의자에 마블(MARVEL) 캐릭터들을 새겨 넣으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였다. 생각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계속 디즈니사의 문을 두드렸고, 기다림 끝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엔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의자 사진을 찍어 SNS에 업로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이언맨, 블랙펜서, 데드풀, 캡틴 마블에 이르기까지, 이 정도면 게임용 의자의 신기원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주문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기능성이 뛰어난 디자인에, 마블 캐릭터, 거기에 가격까지 낮은 편이니, 미국 소비자들에게 입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별점이 오르고, 아마존 순위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2018년 2억, 2019년 5억 원 수준이던 매출액이 2020년 120억 원 수준으로 급등했다. 1년 매출액 성장률이 무려 2,400%다. 무모한 도전이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으면 마법 같은 일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단,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지려는 노력과 실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저 연락하고, 문을 두드렸더니, 마블(Marvel)과 계약하는 마법(marvel)이 일어났다.
K 대표와 처음 만난 건 2020년 봄이었다. 주문이 늘어나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데, 운영 자금이 부족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중국 공장에서 의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미국 내 창고에 보관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각 가정에 배달한 후 판매대금 결제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2개월이었다.
생산자금은 미리 지급해야 하는데, 최소 한두 달이 지나야만 판매대금이 들어오기에 늘 자금유동성이 부족했다.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100만 불 수출탑, 500만 불 수출탑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출 주력기업은 정책금융 1순위다. 자금 부문의 숨통이 어느 정도 트이자, 회사의 매출액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판매량이 급증해, 아마존에서 의자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돌이켜 보면, K는 준비된 사업가였다. 경영학 전공, 오랜 대기업 근무 경력, 철저한 시장 조사, 영어/중국어 활용 능력, 유관 업종 사업 경험, 배우자의 응원, 동업자와의 신뢰 및 역할 분담까지, 창업의 정석이었다.
물론, 그가 창업을 위해 경력을 쌓은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살아오다 창업에 이르렀을 때, 기존의 실력과 경험이 자연스레 회사 운영 과정에 녹아들었을 뿐이다. 사업 성공은 로또 당첨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단언컨대, 요행에 기대어 성장한 기업은 없다.
불과 5년 만에, 자본금 1천만 원짜리 법인이 한국, 중국, 미국, 일본을 넘어 유럽까지 진출하는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거듭났다. 매출액도 2020년 120억, 2021년 175억, 2022년 210억으로 계속 상승세다. 아이템은 '의자', 딱 하나로 충분하다.
회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회사 구성원들의 꿈도 함께 성장 중이다. 한국, 중국, 미국, 일본을 넘어 유럽 대륙까지, 한계점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바퀴 달린 의자는 어디든 이동 가능하다.
나도 K 대표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 중이다. 5년 후, 그가 글로벌 기자 간담회에서 나와의 인연을 잠깐이나마 떠올려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K의 회사가 정책금융 수혜기업의 수준을 넘어, 자본시장의 끝판왕인 상장기업, 아니 그보다는, 미국 나스닥 기업으로까지 승승장구하기를 바란다. 왠지 크게 일 한번 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대표이사(Chairman) K의 자리(Chair)는 아이언맨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