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배신하고, 다시 믿고.
나의 수감일지(受監日誌)
평상시와 다름없던 목요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적당한 집중력과 약간의 허기짐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전날 출장 다녀온 용산구에 소재한 컴퓨터 주변기기 유통기업에 대한 심사서를 작성 중이었다. 처음엔, 부정적이었다. 회사가 아닌, 대외협력팀을 통해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직접 방문하거나 연락하면 될 일인데, 아직도 이렇게 정치인의 힘을 빌려 민원을 해결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참 시대에 뒤떨어지는 처세다. 하긴, 여전히 이런 부류의 민원인들이 있기에 여의도 국회는 불야성에 북새통 아니겠는가.
막상 회사 사업장에 다녀오고 나니, 선입견과 부정적 생각은 많이 해소되었다. 설립 후 계속 성장 중인 회사였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해서는 신규 아이템(상품)을 추가로 구매하고, 경력직원을 채용할 필요가 있었다. 구매대금 결제를 하다 보니 운영자금이 부족했다. 마침 회사에서 딱 필요로 하는 맞춤형 상품(제도)이 있음을 알고, 고민 끝에 연락한 거였다.
부정 청탁의 소지가 있으니, 다음부턴 담당자에게 직접 필요한 사항을 전달하라며 점잖은 충고를 했더니, 대표이사 K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그런 건지, K 대표는 이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동감의 의사를 표명했다. 내친김에, 뜬금없는 정치 이야기도 삼가 달라는 첨언도 덧붙였다.
좋게 표현하면 인맥, 네트워크지만, 나쁘게 말하면 부정 청탁, 브로커다. 더구나, 제삼자를 통한 로비는, 회사에 부정적 이슈가 있거나, 경영실적이 미흡하거나, 대표이사의 신용이 나빠졌거나, 숨은 경영실권자가 있거나, 뭔가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한 20년 다니다 보니, 직관과 통계는 얼추 엇비슷하다.
이번에도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창 바쁜 목요일 오전 11시, 갑자기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니, 괜히 긴장되고, 느낌은 싸늘했다.
“안녕하세요, 요세프님. 감사실 000 팀장입니다. 3년 전 취급하신 A 주식회사 관련으로 메시지 드립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 한창 정신없던 때였다. 초유의 사태를 맞이해 누구보다 힘든 건 기업인들이었다. 대면 접촉이 금지되고, 자연스러운 통행과 미팅마저 제한되다 보니, 기업의 영업활동이 직격탄을 맞는 건 불가피했다.
매출은 급감하는데, 직원들 인건비와 고정 판관비는 지출해야 하니, 웬만한 중소기업들은 팬데믹 앞에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접거나, 아니면, 긴급 (정책) 자금으로 버텨보는 방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A 기업은, 물론,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만 극복하면, 결국 회사는 다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B 대표를 만나기 전, 먼저 연락을 준 건 대외팀이었다. 모 국회의원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성실하게 기업을 키워나가고 있는 MZ 세대 청년기업인이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으니, 여건이 되면 한 번 살펴봐달라는 것이었다.
레퍼토리는 거의 다 비슷하다. 물론, 그에 대응하는, 나의 답변도 거의 다 비슷하다. 신속하게 검토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되, 쓸데없는 로비 같은 건 하지 마시고, 필요한 내용은 직접 전달하라는 쓴소리 한마디를 남기는 것까지. 매번 정해진 루틴이다.
A 기업은 아파트, 건축물 미장공사, 도배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전문건설업체다. B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우고, 도움을 받아 몇 년 전 법인을 설립했다. 함께 일하던 친한 동생이자, 성실한 후배인 C를 이사로 영입했는데,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본인의 주식지분 50%를 양도하기까지 했다.
대표는 수도권 소재 아파트 관리소를 돌며 영업에 주력했고, C는 경영관리 및 현장 인력배치 업무를 담당했다.
B에 대한 업계의 평은 좋았다. 젊은이가 관리사무소 어르신들과 잘 소통하고, 현안 파악 및 해결에도 적극적이며, 무엇보다 저렴한 공사원가에 아파트 외벽 공사를 성실하게 잘 수행해 내니, 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A 기업을 찾는 경기도 일대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크게 늘었고, 법인설립 3년 만에 매출액은 100억 원에 이르렀다.
승승장구하던 차에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었다. 관리사무소들이 아파트 외벽(도배) 공사비를 비롯한 관리비를 정산하기 위해서는 주민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동안엔, 자연스레 월간 정례회의를 개최하고, 관리비 집행의 적정성을 검토하여, 공사업체를 비롯한 다수의 상대방에게 비용을 지급하면 됐었다.
그런데, 대면 회의가 금지되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공사대금 입금을 연기했다. 페인트를 비롯한 원재료 구매대금과 현장 근무자들에 대한 수당은 이미 지급했는데, 정작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공사비 청구대금을 지급해 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처음엔 3개월, 4개월 후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가끔은 비대면 회의를 열어 밀린 공사대금을 지급해 주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도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 시스템이 갖추어진 곳들은, A와 같은 중소기업의 거래처가 아니었다.
A 기업처럼, 디지털 활용 역량이 떨어지는 아파트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관리소장과 미팅하고, 읍소하면서 다녀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월 고정비가 수천만 원에 달하니, 대표이사 개인 자금을 투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처음엔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장인어른의 도움도 받았는데, 잘못하다간 초가삼간 태울 우려가 컸다.
B 대표는 다른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주변의 조언을 듣고, 우리 회사의 문을 두드린 거였다. 대표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듣고 나니, 여지없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발휘된다.
그래! 처음에 어떤 루트를 통해 연락이 오든,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더구나, 팬데믹과 이로 인한 자금난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상황이었다.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A 기업도 일시적 자금난만 벗어나면,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회사라고 판단했다. 지역 기반 전문건설업체로 실적을 잘 쌓아가면, 도급순위 상위권의 중대형 건설사로 도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B 대표는 십수 년간 건설업 분야에만 종사하다 보니, 스스로 금융 문외한이라고 고백했다. 사업에 은행 대출금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며 살아왔는데, 이번 기회에 정책금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살면서, 한 번도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본 적 없었고, 공무원은 모두 세금 먹는 도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알았다며, 주변에 자랑 많이 하고 다니겠다는 말도 남겼다.
이런 게, 일하는 보람이다. 나중에 회사가 잘 되고, 못 되고는 두 번째다. 처음 우리 사무실을 방문할 때의 어색한 눈빛, 분위기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는, 사뭇 환한 미소로 바뀌곤 한다. 그 반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해, 난 아직도 이 조직에 발붙이고 있다.
난 지금도 B 대표의 선의(善意)를 굳게 믿는다. 그가, 5년여간 힘들게 성장시켜 온 회사를 일부러 망하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사람을 너무 믿었던 게 문제였으리라.
다시 회사에 자금이 돌고, 팬데믹에 적응한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재개하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도 비대면 회의가 정례화되자, A 기업은 곧 활력을 되찾은 듯했다.
B 대표는 가끔 운전 중 나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묻곤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슨 말을 하려는지가 전달되었다. 그렇게, 잘 되어가는 줄만 알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공동 최대 주주 C가 느닷없이 우리 사무실에 방문했다. 새롭게 대표이사에 취임했다는 D와 E를 대동하고서 말이다. 등기부등본을 발급해 보니, A 기업은 어느새 대표이사가 총 4명인 법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들어보니,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했다는 답변이다.
설립대표 B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했더니,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단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각설하고, 방문한 이유가 무언지 물었다. 회사 운영은 잘 되고 있으니 걱정은 하지 말라면서도, 자금의 최종적인 상환 책임자가 누구냐고 질문한다. 예전 내가 회사를 방문했을 때 선량한 미소와 상냥한 답변으로 나에게 안도감을 주던, B 대표가 칭찬하던, C였다.
혹시,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올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약정서를 복사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리해서 문서로 질의하라 하고, 난 책임경영자인 B 대표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소통하겠노라고 답했다.
B 대표와 어렵게 통화가 되었다. 그가 병원 입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분명 건강해 보였고, 불과 몇 개월 전에도 기분 좋게 통화도 했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알고 보니, 내부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거였다. B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생 함께 갈 거라 믿었던 C의 반란이었다.
물론, 난 회사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B와 C 사이엔 회사 운영방식에 대한 이견이 있었을 것이고, C는 경력직원이던 D와 E의 도움을 받아 B의 경영권에 반기를 든 것으로 보였다.
하여튼, 문제는 A 기업에 단독 과점주주(51%)가 없다는 점이었다. 애초 지배구조의 불안정성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이고, 경영진 간 특수한 관계가 인정되었기에, 설마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거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코로나 특례자금이었던지라 신속한 의사결정을 했던 것도 있지만, 조금 더 B 대표와 C의 관계, 회사 내 C의 역할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던 데 대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특이사항이 부각되었다 한들, 의사결정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B 대표는 언젠가부터 실질적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 같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컸을 것이고, 아마, 그로 인해 화병이 커진 것 아닐까 싶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간다. 외부 평판 관리와 영업력에 금이 가는 건 물론이다. 거래처 직원들에게도 새로운 대표이사 C, D, E의 존재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렇게, 회사는 쓰러져갔다.
그들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무렵 회사 통장(잔고) 최대액수는 한 10억쯤 되었으려나. 3명이 3.3억씩 나누어 인출하고, 회사를 내다 버리기엔 그동안 쌓아온 역량과 자산이 아까울 따름이다. 하긴, 회사에 별 애정이 없는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국, 회사는 3년 만에 망했다. C, D, E의 경제 사정은 알 길이 없으나, B 대표의 신용은 이미 엉망이었다. 경영권 분쟁을 겪는 와중에도 개인카드, 신용대출을 써 가며 뒷수습하던 흔적일 것이다.
목요일 오전 11시 감사실로부터 온 메시지는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20년을 다녔어도, 여전히 감사받는 일은 고역이다. 죄인의 심정으로, 수감일지를 핑계 삼은 반성문을 제출했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미리 살펴보지 못한 잘못, 공동 최대 주주 C의 역할과 실질적 경영실권자에 해당하는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잘못을 구구절절 적었다.
그러면서도, 자금지원의 타당성과 불가피성, 기타 참작할 만한 사안들도 조심스레 기재했다. 부디, 나의 신상에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일은 그 일이고, 오늘은 또, 오늘의 일을 해내야 한다. 공교롭게도, 대외협력팀의 연락에서 시작된 A 기업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심사기업도 바뀌고, 대외협력팀 직원도 바뀌었지만, 싱숭생숭한 내 마음만은 수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순 없다. 회사마다 특성과 사정이 다르고, 대표이사의 역량도 천차만별이니,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리거나, 부정적인 선입견은 갖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 의견에 지점장님의 판단을 더해 최종 의사결정을 내렸으면, 그걸로 족하다. 이제부터는 회사 몫이다. 그저 대표이사를 믿고 응원하는 수밖에. 행여, 회사가 잘못되더라도, 남 탓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생길 뿐이다.
단언컨대, 10년 20년 한 업계에서 근무하다가 기업을 창업하고, 회사를 운영하던 차에 운영자금, 시설자금이 필요해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는 대표들치고, 일부러 회사를 부도 처리할 사람은 없다. 기업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삶이 언제나 의도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행여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말고, 책임을 다하며 해결해 가면 될 일이다.
직장인도, 기업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업무상 과실이 드러나면, 벌 받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기업가의 망가진 신용은 다시 회복하면 된다. 정 안되면, 파산/면책 후 다시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퇴근길, 혹시나 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B 대표는 연락되지 않는다.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리라. 그가 훌훌 털어버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재기하면 좋겠다. 이대로, 숨어버리기에 B는 여전히 젊다. 그리고, 난 여전히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
믿고, 배신하고, 다시 믿는 삶이, 오늘도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