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의 정석

행운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by 임요세프

수학 문제는 공식에 맞는 답을 낼 수 있겠지만, 진짜 세상일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스노우폭스의 김승호 회장은 최근의 저서 <사장학 개론>을 통해 기업가가 가져야 할 덕목과 성공 노하우를 설파했다. 그가 성공한 기업인이고, 전작 <돈의 속성>이 워낙 큰 인기를 끌었기에, 이처럼 확신에 찬 책 제목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


흔히, <개론>이라 함은 보편적인 기본 개념과 일반이론을 추려서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직간접적인 경험, 철학, 판단, 그리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행운 등이 어우러진 그의 성공담에 <기본서>의 이름을 붙이는 건, 과감한 측면이 있다.

조금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가치관, 신념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정보는 애써 외면하는 <확증 편향>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별 상관없다. 자기 계발서나 수필이 학술지에 투고하는 논문도 아니고, 검증이 필요한 학술서적도 아니니 말이다. 과감함은 자신감의 산물이다.



창업에 정답은 없다. 어느 시점에, 어떤 아이템으로, 누구와 어디에서 창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맞고 틀리고 가 있을 리 없다. 뭉뚱그려 창업기업 전체의 생존율, 업종별/연차별 폐업률이 계산될 뿐이다. 잘된 기업의 성공비결, 잘못된 회사의 실패 원인 등은 그저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언제나 상식인 창업학 이론서는 없다.


그래도, 나의 오랜 동 업계 종사 경력과 직관력, 판단력을 한데 모아 <창업의 정석>을 논해 보고자 한다. 오히려, 사업에 성공한 적도, 실패한 적도 없으니, 편견은 덜하리라.


20년간 수백 개 기업의 설립, 성장, 성숙, 쇠퇴, 재도약의 과정을 지켜보고, 기업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금융 지원도 취급해 보고, 실패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증 논문도 써 보았으니, 한마디 거들 자격은 되는 듯하다.

올바른 창업 방법을 하나, 둘 번호 붙여 개괄식으로 설명하는 건, 잘 와닿지 않는다. 가급적, 실제 사례를 들어 서술하는 편이 더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다.


그런 의미에서, J 대표는 내가 생각하는 <창업의 정석>에 부합하는 창업가다. 그의 창업 역사를 따라가 보자.



J는 우리나라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전자공학, 컴퓨터 공학 석사를 전공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그의 첫 선택지는 취업이었다. 입사한 곳은 엘지전자다. 대기업은 다양한 업무를 폭넓게 배우기에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쌓아 온 지식을 제품 개발응용하고, 실력을 늘리기에는 제격이다.

그는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근무하며, 내로라하는 전문가,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일했다. 지식과 이론실제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몸소 체험했다. 신사업 기획 담당자로 근무한 일은 IT 개발자가 아닌, 경영관리 담당자로서의 색다른 경험이었다.


애당초, 그는 Specialist로 입사했다. 7년의 재직기간 동안, Generalist로서의 역량을 더한 인재가 되어 대기업 생활을 마무리했다. 시작보다 끝이 아름다운 이별이다.


그의 다음번 행선지는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이었다. 엘지 그룹 계열사의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중소기업 대표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결과였다. 물론, 급여와 복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이직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나, 지난 성취와 기회비용만 생각하다 보면, 평생 과감한 도전은 하지 못하게 된다.

J는 대기업에서 프로젝트 파트너로 만났던 여러 중소기업 중 성장 가능성이 높은 H사를 선택했다. 직함은 등기이사 겸 Product Manager 겸 COO(기업 운영총괄 책임자)다.

한마디로, 이 일 저 일, 다 담당한다는 뜻이다. 본연의 업무는 없다.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스타트업에서 허울 좋은 감투 따위는 큰 의미가 없다. 회사가 생존하고, 성장해야 본인도 살고, 추가적 과실(주식, 배당금, 스톡옵션)도 기대할 수 있다.


전자공학 전공자,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의 경력개발이 최우선이지만, 이직 후에는 어불성설이었다. 개성 강한 직원들을 어르고 달래는 일, 낯선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 영업하고 계약을 체결하는 일, 자금관리 책임자로 은행과 정책금융기관을 다니며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일, CEO와 함께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대기업에 재직하는 동안 업무역량을 인정받고, 퇴직할 때까지 평판도 나쁘지 않았던바, J는 H사로 이직한 후에도, 대기업 프로젝트를 수주받을 수 있었다. 실적 포트폴리오가 쌓이니, 자연스레 거래처도 늘어났다. 불과 3년 동안, H사는 공공기관에서 인정하는 <퍼스트-펭귄> 기업으로 도약하기에 이른다. 연간 매출은 100억 원대, 이 정도면 안정적 사업 기반을 갖추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J는 제 역할을 다했다. 대기업 7년, 중소기업 3년, 총경력은 자그마치 10년이다. 담금질의 시간으론 충분하다. 이제, 자기만의 업(業)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J는 자본금 1천만 원의 법인을 설립했다. 사무실은 동 업계 지인이자, 거래관계에 있는 회사의 본점 내 한자리를 무상으로 빌렸다. 임차보증금과 월세는 없다. 창업 후 몇 개월은 직원도 뽑지 않고 버텼다.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망하지 않는 것이 제1원칙인 1인 기업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소프트웨어 개발업, 인터넷 정보 서비스업체인 만큼 매출원가도 없다. 매출액 전부가 오롯이 수익인 셈이다. 게다가 인건비, 임차료와 같은 고정비용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쳇말로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효율성 높은 기업의 탄생이다.

J가 그동안 모아 놓은 근로소득, 퇴직금, 배당금은 적지 않지만, 굳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있어 보이는> 스타트업 대표가 될 필요는 없다. 실속 있는 기업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다.

사무실 건물주 L과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여러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진행했었다. 1년 전, 새롭게 추진하는 업무(소셜 커뮤니티 소프트웨어 개발, 블록체인 개발, 보안 솔루션 구축, 물류시스템 개발)에 개발자로서 힘을 보태달라는 제의를 받자, J는 때가 왔다는 확신으로, 사업자등록을 내고, 동등한 파트너사로서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사업개시와 동시에 수천만 원의 매출이 발생한 셈이니, 시작이 좋았다. 사무실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대신, 공동 프로젝트 진행에 따른 기술 제공, 코딩, 인력파견 등 협력사로서 역할을 다하는 중이니, 서로 윈-윈이다.


그렇다고, J가 모든 소프트웨어에 능한 건 아니다. 제조업, 정보통신업, 콘텐츠 산업,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체에서 구축하는 플랫폼, 보안 솔루션, 웹사이트 구축 등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는 그의 역량과 한도를 초과하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프로젝트별로 외부 개발인력, 즉, 프리랜서를 활용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업무 성과나 열의는 탐탁지 않다.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매출이 나오면, 인력 채용은 필수다.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1인 기업으로 계속 있을 수는 없다.


그럴 거면, 당초에 독립할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 연봉 많이 받으면 될 일이다. 기껏 창업했는데, 비용 아끼겠다고, 혼자 코딩 프로그램 짜고, 프레젠테이션 자료 만들고, 영업하고 다니다가는 얼마 못 가 쓰러진다.


회사 키워서 돈도 벌고, 기왕이면 고용도 늘리고, 경제적 부가가치도 창출하고, 사회적 효용도 높이려고 사업하는 거다.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다.


J의 회사는 1년 사이 매출이 계속 늘었다. 역할을 더할 여력이 확보된 셈이다. 올 하반기 일거리도 충분하다. 블록체인 기업, 전기차 기업, 법률회사, 엔터테인먼트 회사, 해외기업 등 다수의 기업이 J에게 프로젝트 협업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성장하는 기업은 별도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독립적인 사무실이 있어야, 임직원이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낀다. 거래처와 미팅하고, 회의할 장소도 필요하다. 구별된 대표의 자리가 있어야 권위가 유지된다. 조직은 위계질서가 필요하다.


벤처기업 인증, 지식재산권 등록, 소프트웨어 개발 등 기술개발 투자도 계속해야 계속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판매관리비 절감이 아닌, 규모의 성장에 방점을 두는 기업으로 도약할 시점이다.



J는, 가히 창업가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고, 외국 유학도 다녀왔다. 이후 큰 규모의 기업에 들어가 경력을 쌓고, 조직 시스템도 익혔다. 전공 이외의 분야도 접해보고, 시야를 넓혔다. 퇴직 후, 동 업계의 중소기업으로 이직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한층 키우는 한편, 예비창업자로서의 경력도 쌓았다. 이후, 지인으로부터 협업 제안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업을 창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때의 일이다.

창업은 인생의 플랜 B가 될 수 없다. 자유를 위한 탈출구도 아니다. 창업으로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없다. 삶의 전 과정에 성실하고, 준비에 철저한 사람만이 성공적인 창업가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성공한 기업인의 무용담이 아니다. 실패하지 않는 창업가 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 물론, J 대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시장 전체의 체계적 위험은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이 실패의 확률을 낮춰줄 것임은 분명하다. 기업특유의 비체계적 위험이 높을 리 만무하다.

돈을 버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실력, 시간, 운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예측하는 한, J가 10년 후에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아 성장하는 기업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게 <사장학 개론>에도 부합한다.



무턱대고 창업하는 건 위험하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장상사나 동료가 힘들게 한다고, 충동적으로 퇴사한 후, 퇴직금 털어 창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두 알다시피, 회사 밖은 지옥이다.


그러나, 시기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퇴직은 찾아온다. 큰 욕심은 내려놓되, 차분하게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그때까지 제1 덕목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준비되었다면, 최선은 1인 기업 창업이다. 경영에 자신이 없다면, 지분 투자자가 되는 것도 간접 창업이 될 수 있다. J와 같은, 될성부를 나무(유망창업기업)의 떡잎을 미리 알아보는 것(투자)도 실력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어떤 결정이건 간에, 실력과 경험, 과감한 실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답은 없을지언정 창업도, 성공도 정석은 있다. 행운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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