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 블루스 (Marbles)

잿밥에 관심 두지 않기

by 임요세프

지하철 5호선 마장역에서 내려 마장동 먹자골목 주변에 다다르면, 고기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예전부터 축산물시장으로 유명했던 지역인지라, 지금까지는 마장동 특유의 동네 분위기, 내음으로 받아들였을 터지만, 앞으로는 아닐 수도 있을 듯하다.

성동구 왕십리, 상왕십리 주변은 이제 서울의 중심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고급 주거지, 상업시설이 늘어나다 보니, 아무래도 기존 마장동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L 대표가 운영하는 회사는 수입 축산물 유통업체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소고기(등심, 안심, 채끝)를 국내 도, 소매 축산물업체에 납품한다. 일반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먹자골목, 축산물시장에 사업장을 둘 필요는 없다.


역시, 회사를 찾아가 보니, 지하철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 주택용 5층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외관에도 신경을 많이 썼는지, 밖에서 볼 때는 여기가 축산물 유통기업이라 추측하기엔 쉽지 않다. 흡사, 건축 설계감리 전문회사 분위기마저 풍긴다.


L 대표는 20년 이상 축산물 업계에 몸담고 있다. 유명 호텔, 대형 공판장 등에서 식육 제품 유통, 영업 등을 경험한 후, 본인의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엔 국내산 한우, 돼지고기 유통업에 종사했으나, 워낙 경쟁이 치열한 탓에 차별점을 모색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소고기 수입이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자유화되자, 회사의 규모는 점점 성장했다. L 대표의 목적은 분명했다. 싸고, 맛있고, 질 좋은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회사의 경쟁 우위라고 해봐야, 품질과 가격경쟁력이 전부이다 보니, 큰 이윤을 남길 수도 없는 일이다. 남들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영업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전국 각지에 소재한 거래처 수가 팔백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한우가 가격만 좀 더 저렴하다면, 나도 아이들에게 한우를 많이 먹일 텐데, 소비자 가격을 보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국산, 호주산 소고기를 즐긴다. 어디 나뿐만이겠는가. 애국심에 호소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소비자의 선택은 맛과 값에 달려있다.


그는 사업에 성공했다. 20여 년간 확보해 둔 국내외 영업 네트워크가 탄탄하고, 경쟁업체보다 더 낮은 가격에 고기를 판매하다 보니, 거래처들이 여간해선 다른 구매처로 갈아타지 않는다. 회사의 자금 유동성, 현금수지가 좋아지다 보니, 판매대금 결제기일도 넉넉해 거래처들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선순환이 계속된다.


마블링(Marbling) 사업으로 놀라운(Marble) 성공을 한 셈이다. 게다가, 회사 구성원들 간 단합도 잘 된다. 급여와 복지, 그리고 주주 배당을 매년 늘린 덕이다. 수입, 보관, 유통, 영업, 경영관리 등 각자가 맡은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보낸 세월이 십수 년이다. 안 되려고 해야 안 될 수가 없는 구조다.


능력 있는 직원들은 몇 년간 L 대표 밑에서 일을 배운 후,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했다. 자기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L의 태도는 남달랐다. 그들을 지켜보다, 싹수가 보이는 후배의 회사에는 기꺼이 지분투자와 고기 공급으로 후원했다. 그중에는 오픈마켓을 통해 일반 소비자들에게 소고기를 판매해 크게 성공한 직원도 있다. 독립 3년 만에 전자상거래 소매 매출액이 연간 100억 원 넘는 곳도 생겼다. 서로 윈-윈이다.

십 년째 회사의 매출액은 200억 원을 넘었다. 신축한 현재의 사업장 가치도 몇 년 새 크게 올라, 시쳇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부동산소득이 근로소득을 넘어선 적절한 예시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의 자산 규모, 매출액, 기업 가치가 크게 올랐다. 건물 임대 수입은 덤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오히려 특수효과로 매출액이 100억 이상 더 늘었다. 가정식 밀키트 주문과 캠핑족들의 여행증가에 따른 고기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L의 전성기가 도래한 셈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영원한 성공은 없다. 위기 뒤에는 기회가 찾아오고, 짜릿한 성공 뒤엔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자가 사업장 신축으로 부동산 투자에 눈 뜬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건물 가치가 오르자, 주변 부동산업자들의 연락과 방문이 늘었다. L 대표는, 오래오래 안정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자 지금의 자리에 회사 사옥을 신축했을 뿐이다. 그런데, 별다른 노력 없이 신축한 지 3년 된 건물을 수십억 넘는 웃돈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들이 생기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본업이 잘 되는 와중에 부동산 투자에까지 성공한 셈이니, 거칠 것이 없었으리라. 그래도, 젊은 나이를 고려하면 아직 본업을 접을 수는 없는 노릇, 애정이 듬뿍 담긴 본사 사옥을 팔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의 선택은 오피스텔 시행사, 시공사에 대한 투자였다. 이른바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다. 보통은 은행이나 새마을금고, 저축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건축물의 사업성을 파악해 대규모로 자금을 투입하는 사업이다. 총 자금 소요액 대비 PF 대출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부족하다 보니, 시행사 측에서 인맥을 통해 L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하다.

그가 살펴보니, 이미 오피스텔, 일반상업시설 신축, 분양에 성공한 이력이 많은 시공사였다. 재무제표를 살펴보아도, 특별히 부각되는 부실 징후는 없었다. 재무 구조도 탄탄했다. 이번에 신축하는 오피스텔 위치도 수도권 도시의 지하철 인근이었기에, 분양에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 베팅을 단행했다. 금액은 수십억 원이다. 여러모로 놀라웠다. 사업에 성공하는 경우, 이렇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점도 놀랍고, 다른 일에 이렇게 큰 금액을 통 크게 베팅할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오피스텔 분양률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공급 과잉이었다. 게다가, 거의 제로금리에 가까웠던 기준금리가 상승한 나머지, 시공사의 조달금리도 가파르게 올랐다. 시행사와 시공사는 부도 위기에 처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피스텔 신축과 소유권 보존등기가 완료됐다는 점이다. 가장 위험한 일은 건물을 짓는 와중에, 유동성 위기에 처하는 일이다. 그러다간 시행사, 시공사, 투자자, 분양권자, 임차인 모두 큰 고통을 받게 된다.

다행히, 오피스텔 절반 이상은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한 지역기업에서 직원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오피스텔 수십 채를 매입해 준 덕이다. L 대표도 투자금 중 절반은 회수할 수 있게 됐다. 나머지, 물건들은 경매에 넘겨졌는데, 최초 채권자들(금융회사)이 협의를 통해 경매 취소 후 일괄 매수를 추진하고 있는 모양새다. 매입 후 재매각, 혹은 임대할 요량이다. 부디,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리길 바랄 뿐이다.


그는 수년 동안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수업료치곤 너무 크긴 하지만, 그래도 버틸 여력은 있다. 본업이 여전히 순항 중이고, 최악의 경우라도, 오피스텔 소유권을 넘겨받아 시간을 두고 매각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교훈은 명확하다. 남의 제사상 잿밥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본인의 전문 분야,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 투자는 깜냥껏, 여유자금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모든 투자는 고위험-고수익(High Risk-High Return) 임을 유념해야 한다.


더구나, 가치주나 성장주 같은 사업성이 검증된 기업의 주식을 사는 일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것이 투자 세계의 기본 원칙이다. 이른바, 포트폴리오(Portfolio) 이론이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사업이 아닌, 투자의 영역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대규모 건설사업에 일개 개인투자자가, 굳이 개입할 필요는 없다. 자칫하다간, 초가삼간 다 태운다.


L 대표도, 이제 와 돌이켜보니,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일이었다는 고백이다. 무슨 일이든, 일단 결심이 서고 나면, 후퇴하기가 쉽지 않다. 일 저지르고 나서 후회할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투성이기 때문이다.



성공에 자만해서는 안 된다. 물론, 쉽지 않은 말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내가 아직,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례를 본보기 삼아, 잘할 수 있는 일에 더욱 집중하고, 큰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결심해 본다.

이제 곧 추석 시즌이다. 다시 L 대표에게 거래처들의 주문 전화가 크게 늘고 있다. 경기 불황이라고들 하는데, 고향 추석 밥상에 오를 소고기, 돼지고기는 올해도 풍성할 듯하다.


미국과 호주의 고기 수요가 감소한 탓인지, 아니면 공급량이 늘어난 탓인지,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대폭 할인된 가격에 대량 매입(수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회사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다시 상승할 것이 확실하다.


L은 더 이상 한눈팔지 않고, 본업에만 주력할 예정이다. 여유자금이 생기면, 직원들 급여와 복지를 늘리고, 거래처들을 더 세심하게 챙길 계획이다. 기회가 되면, 전도유망한 스타트업을 찾아 지분투자를 늘리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족, 직원, 사회, 더 나아가서는 이 국가에 본인이 이바지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픔을 훌훌 털어내고, 앞을 바라볼 때다. 장동 (Marjang Blues), 슬픈 음악은 멈출 시간이다. 마블링(Marbling)이 잘 된 소고기 제품으로, 다시 기적(Marble)을 만들어 낼 시간이다. 캡틴 마블이 이끄는 한, 꿈은 이루어진다. 아직, 마장동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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