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하문(不恥下問)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점심 식사 후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다가, 커피숍 창가에 붙여진 문구를 보았다. <커피, Bitcoin으로 결제 가능>. 며칠 전, IT 부서에서 일하는 후배로부터 이야기 들었던 비트코인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옆자리 선배도 언뜻 비트코인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는 나처럼 전형적인 문과 출신 사무직인지라,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코인 지갑을 만들어 직접 거래하지 않는 이상, 비트코인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터다.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의 차이도 크다. 내심 궁금했지만, 알량한 자존심에 더 묻지 못했다. 커피숍에 다시 가서 사장님께 물어볼까도 했지만, 그 역시 생각뿐이었다.
나는 이미 30대 중반에 꼰대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여기며, 내가 다니는 회사가 세상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이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데, 나는 여전히 닫힌 세상을 살고 있었다. IT 부서 후배가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무료로(!) 설명해 주는데도, 귀를 닫고, 근로소득의 정통성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게 바로 나였다. 과거에 갇힌 자에게, 미래의 문이 열릴 리 만무하다.
물론, 옳고 그른 건 없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트코인의 가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여전히 자본주의의 기세는 등등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실한 근로소득자들의 정년 연장에 대한 논의도 한창이다. 누군가의 피해를 전제로 하는 주식, 부동산, 코인 투자 등 재테크를 멀리하는 것도 삶의 태도 중 하나다. 다만, 세상의 흐름을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배운 바를 적극 실천하는 사람들을 욕해서는 안 된다. 부러우면,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공부하는 편이 낫다.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눈과 귀를 닫으면 지는 거다.
블록체인 기술과 비트코인의 미래에 대해 확신했던 IT 부서 후배는, 결국 십수억 대부자가 되어 회사를 그만뒀고, 나는 이십 년 이상 같은 회사에 출근하는 중이다. 커피숍 사장님은 건물주가 됐다는 후문이다. 머뭇머뭇하던 선배도 역시나 나처럼 성실하게 근무하고 계신다.
일찍이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누구에게라도(아랫사람에게라도) 물어야 발전한다고 말이다(不恥下問). 중요한 건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부족하다고 느끼면 배워야 한다. 평소에 밥 사주고, 커피도 사주던 선배가 배움을 요청한다면, 후배는 분명히 없던 시간까지 내서 흔쾌히 응답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후배가 자기 돈으로 비트코인을 사서, 선배의 지갑에 넣어 줄지도 모른다. 가르침은 행복한 일이다.
후배의 퇴사 이후, 빈 지갑의 공허함도 달래고, 더 늦기 전에 머리라도 채워야겠다는 결심 하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통계 실력이 부족한 탓에, 대학원 생활 내내 큰 부담감이 있었다. 이론 중심의 수업, 논문 읽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통계 수업은 늘 마음의 짐이었다. 경영학을 포함한 사회계열 논문은 대부분 통계로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것이 철학의 영역이라면, 화두(질문)를 던진 후 증명까지 하는 것이 논리(학문)의 영역이다.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았다. 회사 업무 특성상 통계 프로그램 활용 능력이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고객과의 대면 업무 위주로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해왔기에, 다른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틀에 맞게 빈칸 채우기만 하면 충분했다. 나의 업무는 창조적이라기보단, 미시적이고 직관적인 일이었다. 통계와 확률로 답을 찾는 일이라기보단,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그 안에서 회복탄력성, 성장 가능성을 보유한 기업을 찾는 일이었다. 어쩌면, 내 일은 통계에 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 외연 확장에 한계를 두는 것이다. 통계와 확률을 알아야 다음번 의사결정에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다. 모르면 묻고 배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이 마흔에 상아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더는 닫힌 세계에만 갇혀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체면만 차리고, 우물쭈물하다가는 또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나의 스승은 나보다 어렸다. 그는 이른바, 통계 전문가였다. 그는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기초자료를 토대로 통계 분석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고경력자였다. 대학원 과정도 막바지에 이르러 경영학 전반에 걸쳐 이론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교수님의 위임을 받아 통계 수업도 대신할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농담 삼아, 웬만한 통계는 왼손, 아니 발로도 돌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문제는, 그가 다소 거만하고 직설적이라는데 있었다. 참고로, 그는 내 고향 5년 후배이기도 했다. 고심 끝에 하나를 물어보면, 어떻게 그런 상식 이하의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과 말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마음의 상처도 받았다. 하지만, 어쩌랴. 혼자서는 밤새워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것을. 기왕 이렇게 된 거, 가급적 시간을 끌지 말고, 단기간 내에 최대한 많이 질문하고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둘 모두를 위해 그게 최선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격언은 무시했다. 한 학기 동안은 그의 그림자만 밟고 다녔다. 밥과 술, 커피는 물론, 힘겹게 끊었던 담배도 함께 했다. 통계 비법을 전수받는 데 맞담배만 한 것은 없었다. 총각이었던 그는 주말을 연구실에 나와 보내곤 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주말을 반납해야 했다. 아침 일찍 나와 지난주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있으면, 뒤늦게 그가 출근해 힐끗 쳐다보고 한 마디씩 더해 주는 식이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시나브로 나의 실력은 향상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위계적 회귀분석 프로그램을 활용한 논문을 완성한 후,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했다. 동기 중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졸업은 가장 빨랐다.
2021년, 이승철은 데뷔 35주년 기념 음악 <우린>을 발표했다. 예전 히트곡 <My Love>를 소녀시대 태연과 듀엣으로 재발매한 데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였다. 후배들과의 협업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는 취지였다. 이승철의 이번 선택은 악동뮤지션(A.K.M.U) 찬혁이었다.
여러모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조합이다. 내로라하는 35년 차 가수가, 무려 서른 살이나 어린 작곡가에게 곡을 의뢰했으니 말이다. 이승철이 <오늘도 난>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1996년, 세상에 태어난 찬혁은 어느덧 대형 가수들의 러브콜(Love-call)을 숱하게 받는, 자타공인 작곡 천재이자, 완성형 음악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명색이 슈퍼스타K 심사위원장이 경쟁프로그램(K-팝스타) 참가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좋게 보면 아름다운 후배 사랑이지만, 어떻게 보면 사실상의 SOS다. 물론, 과거에도 박진영, 타이거 JK, 김범수, 김태우, 아이비, 소녀시대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이 선배 이승철의 25주년 기념 앨범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존경하는 선배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헌정(Tribute)의 성격이 짙었기에, 이번 신곡과는 의미가 달랐다. 게다가, 이번에는 웬일인지 몇 달 동안 찬혁으로부터 응답마저 없었다. 라이브 황제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가 거절당할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거절당할 용기가 바로 자존감이다. 이승철은 말했다. “가수는 늘 하던 음악만 하면 도태된다. 가수의 목소리는 지문과 같아서 변하지 않지만, 옷을 갈아입듯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수십 년 가수 하면서 얻은 교훈이다.” 그가 아들뻘 되는 찬혁에게 기꺼이 도움을 요청한 이유다. 거장은 후배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실, 찬혁의 입장에서 부담감은 몇 곱절이었을 터다. 찬혁이 그의 명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 찬혁의 어머니도 이승철의 오래된 팬이다. 아들이 이승철로부터 곡 의뢰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들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니, 찬혁이 대선배의 요청에 섣불리 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다림 끝에, 찬혁은 이승철에게 <우린>을 선물했다. “우리가 잊지 못하는 건 추억이에요, 서로가 아니라. 우리가 견뎌야 하는 건 이별이에요, 서로가 아니라”라는 노랫말과, 그에 걸맞은 슬픈 멜로디는 역시나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오랜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은 답장이었다. 20대 찬혁의 감성은 50대 아저씨의 마른 눈물샘을 터뜨릴 정도로 남달랐다.
이승철은 자존심이 상하기는커녕, 방송국 카메라가 밀착 취재하는 녹음 현장에서 프로듀서 찬혁의 노래 지도를 성실히 수행하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미래 지향성을 증명했다. 같은 노래를 세 번 이상 녹음하지 않는다던 낡은 철칙을 깨고, 이승철은 수십 번, 수백 번의 반복을 통해 노래를 체화(master)했다. 이를 지켜보던 스승 찬혁은 흐뭇해했다.
두 사람은 유희열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다. 스튜디오 녹음 현장을 벗어나, 무대 위에 함께 서자, 이번에는 제자 승철이 스승이 된다. 1999년 히트곡 <오직 너뿐인 나를>을 나누어 부르는데, 아무래도 찬혁의 노래는 어색하다. 박자와 음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연륜과 깊이의 차이리라. 그러나, 승철은 찬혁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저 웃음 지을 뿐이다. 슈퍼스타K 심사위원장의 위세는 오간 데 없다. 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스승과 제자의 자리는 뒤바뀐다.
알량한 자존심은 중요치 않다. 천하의 이승철도 차세대 리더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다음번 목표와 과정에 집중할 일이다. 부족하면, 누구에게라도 배우면 된다. 존경은 다음 세대에게 묻고, 듣고, 수용하는 사람의 것이다. 늦은 시작이란 없다. 이제 다시, 머리와 지갑을 채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