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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May 06. 2024

인연 (2004)

태도(Attitude)에 대하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나,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미워하기를 반복하다가 삶을 마감한다. 물론, 자기 인생과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은 99.99%에 해당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예외다.   

  

나비의 날갯짓이 몰고 오는 후폭풍이 어마하듯이, 요즘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국제정세의 변동이 머나먼 한국 땅에 발 디딘 개인의 일상에도 큰 영향을 준다. 세상이 거대한 하나의 네트워크가 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거시적 이벤트로 인한 감정의 증폭은 일시적이어서 이내 사그라든다. 가뜩이나 빡빡한 세상살이인데 지구촌 걱정까지 사서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위정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데 집중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미움받는 일이다. 살다 보면, 이 세상 0.01%도 안 되는 내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풍문과 소문만으로 미움을 받거나,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다. 소문은 살에 살을 덧붙여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나름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판단하에, 누군가에게 학교생활의 고충이나 직장 상사나 동료 선후배와의 힘든 관계에 대해 터 논다 치면,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건 나에 대한 또 다른 소문뿐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술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는 대화도, 어느 순간 나를 향한 화살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결국, 입조심이 미움받지 않는 최선책인 셈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아닌 한, 말실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실수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한, 새로운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설령 치명적 잘못을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죗값을 치른 이후에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면 마땅히 실수를 만회할 기회, 새로운 삶을 영위할 기회는 필요하다.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유명해질수록, 수면 아래의 소문이 물 위떠오른다. 남 잘되는 건 두고 못 보는 인간의 시기심과 질투심이 발현된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즉 뛰어난 재능은 어떻게든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그와 동시에 모난 돌은 정을 맞기도 한다. 한 번의 잘못은 불특정 다수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혹자는 셀럽의 숙명,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응당 감내해야 할 대가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마녀사냥식 돌팔매는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도 한다는 점에서 반성할 여지가 크다.

    



흔히들 어떤 일을 대하는 자세, 몸가짐, 마음가짐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 태도(Attitude)가 좋다고 표현한다. Attitude라는 단어는 한 사람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되었다. 좀 유식해 보이고 싶을 때, 축구를 대하는 손흥민의 Attitude, 방송을 향한 유재석의 Attitude가 뛰어나다고 말하면 된다. 태도(Attitude)는 본뜻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자리매김한 단어다. <태도>라 쓰고, <진정성>이라고 읽는 시대다.

    

사실, 태도라는 건 동(動)적인 단어다. 인사조직 교과서에서는 태도를 3단계로 구분한다. 태도의 3요소는 인식(Cognition), 감정(Affirmation), 행동(Action)이다. 태도란 한 사람이 객관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른 결과치다. 외부의 환경이나 정보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긍정적으로 행동할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위험한 행동을 할 가능성 크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뒤의 경우다.    

 

돌고 돌아 당사자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부풀려진 소문 하나에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일진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나에 대해 수군거린다면, 작은 실수가 큰 잘못으로 침소봉대된다면, 거짓이 참으로 둔갑한다면, 태도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생의 마감도 본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어야 하지만, 만에 하나 심적으로 무너져 내린 누군가는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촘촘하게 엮인 지금의 네트워크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Attitude)를 오롯이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울감은 쉽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2005년, 최고의 배우로 떠오른 이은주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와 <연애 소설>을 통해 남자들의 순수한 첫사랑 이미지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그녀는, <오! 수정>, <주홍 글씨> 같은 영화로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혔고, 2004년 TV 드라마 <불새>의 여주인공 역할로 자타공인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그녀는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고, 평단의 찬사, 대중의 인기를 뒤로한 채, 끝내 세상을 등지는 태도를 보이고야 말았다. <주홍 글씨> 속 연기가 20대 초반의 여배우가 소화하기엔 워낙 어렵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던 다. 어두운 배역이 그녀의 선택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하려는 올곧은 마음가짐과는 별개로, 그녀는 외부 환경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절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는 그녀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과 이를 퍼 나른 댓글들도 포함된다.

     

온라인 댓글은 밑도 끝도 없음에도, 모두에게 노출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술자리 험담은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이라도 할 수 있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99.99% 사람들에게까지 오픈된 www 네트워크 혹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험담 전문 애플리케이션 환경하에서는, 제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보유한 사람이라 해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처는 커지고, 우울감은 보편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그녀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난다. 문명의 결정체라는 가상의 공간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라면, 차라리 99.99%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수렵채집 시대가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서 좋은 태도(Attitude)를 유지하며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최소한 확인되지 않은 험담을 퍼 나르는 일은 강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잘못과 실수가 확정되고 난 후에 욕해도 충분하다.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건 하는 사람이 아닌 욕먹는 자의 몫일 터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남을 비난하기 전에 거울을 바라볼 일이다. 누구나 말 못 할 비밀은 있다. 삶과 죽음은 어찌할 수 없다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미움 대신 사랑에 전념할 일이다. 길어봐야 100년, 미주알고주알 남들 일에 관심 두는 대신, 나의 <인연>들에게 애정을 쏟기에도 짧은 생이다.  

   



2004년, 이승철은 <인연>을 발표했다. 이 노래는 이서진, 이은주, 에릭이 주연한 MBC 드라마 <불새>의 주제가(OST)다. 새삼스럽게도, 이 노래를 부른 가수부터 드라마의 주인공들까지, 누구 하나 소문과 악담에 시달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실수는 불가피하다. 사회 시스템의 뒷받침과는 별개로, 삶을 긍정하려는 개인의 태도(Attitude)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인연>은 스키를 타다가 어깨를 크게 다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승철에게 예고 없이 찾아온 선물 같은 곡이다. 때로는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 특별히 바쁠 일은 없었을 시기, 최고의 인기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최고의 작곡가 윤일상이 만든 멜로디라니, 눈치 빠른 그가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는 없다. 이승철은 “눈을 떠 바라보아요. 그댄 정말 가셨나요”로 시작하는 가사를 직접 쓰고, 순식간에 노래 녹음을 마쳤다.  

    

그는 사실 이 노래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고 <고백>했었다. 쌍팔년도 음악처럼 좀 구리다나 뭐라나. 하지만, 다음 회차 드라마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인연>이 울려 퍼지던 순간, 그는 히트를 직감했다고 한다. 다음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노래의 하이라이트 부분,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빼어난 가창을 접한 대중은 그에게 드라마 <OST 계의 황제>라는 다소 민망한 타이틀까지 부여했다. 나이 마흔 줄에 아이돌 가수가 즐비한 가요계에서 10대 가수로 선정되는 영광도 뒤따랐다.

     

노래가 발표된 지도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인연>의 생명력은 이어지고 있다. 이승철 라이브 중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 중이고, 수많은 동료 후배 가수들이 여전히 이 노래를 커버(Cover)하고 있다. 어느덧 <인연>은 이승철의 대표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친 김에 그냥 쉬느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적극적 태도(Attitude)가, 결국 의외의 성과로 이어진 셈이다.

     

물론, 잘 되고 못 되는 건 신의 영역이다. 음악, 드라마, 영화가 히트할지를 맞히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기업이 만들어 내는 제품의 성공 여부도 마찬가지다. 잘 된다 한들 모두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인연>의 경우처럼, 차라리 운칠기삼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다. 때로는 심혈을 기울인 노력도 외면받는다.  

    

그러나,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는 것과는 별개로, 제삼자가 무턱대고 충고나 조언, 비판, 비난을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댓글을 아예 안 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보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공개된 공간에 글을 남기는 것 또한 신중할 일이다. 더 이상의 내로남불은 사절이다.


삶을 긍정하려는 개인의 태도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관용이라는 시대정신이다. <인연>은 태도와 관용에 대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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