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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가득한 그리스 음식

그리스 여행기 -6

by 박희성

대낮의 아테네 거리는 생각보다 안전했습니다.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더니 긴장이 풀린 이제야 배가 고파졌습니다. 아크로폴리스 근처에 숙소를 잡았기 때문에 아무 할 일도 없으니 우선 아크로폴리스로 걸어가며 식당을 찾아보았습니다. 따듯한 햇살 아래 여유로워 보이는 거리였지만 식당은 없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쓰인 간판들 사이로 지나가다 보니 이 동네는 청계천처럼 각종 부품을 파는 듯했습니다. 따듯한 국물이 있는 백반집이 숨어 있을 듯 보이지만 어디에도 식당이 없습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저 멀리 케밥집이 보입니다.


안이 어두워 문을 닫았나 싶었지만 다행히 열려 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주인아줌마에게 인사하고 주문을 하려 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만 할 수 있는 배고픈 여행자와 그리스어로 웃으며 계속 고개만 끄덕이던 주인아줌마는 손과 발로 간신히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고기 기둥으로 있던 케밥을 가리키며 하나 달라고 하니 웃음 맑은 아줌마는 계속 알겠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아리송하지만 조금 기다리니 두툼하고 냄새 좋은 그리스 음식 기로스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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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밥과 비슷하게 고기를 썰고 감자튀김과 각종 야채와 함께 피타 빵으로 감싼 음식입니다. 기로스에는 흥미로운 그리스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언뜻 보면 터키 요리인 케밥과 유사해 보입니다. 고기를 빵에 싸서 먹는 것이니 우리가 보기에는 크기의 차이만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터키와의 관계가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같이 좋지 않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두 음식 비슷하다고 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된장국과 미소국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재료부터 맛까지 다르지만 외국인의 시선에서는 비슷한 음식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기로스는 우리가 흔히 보던 거대한 석쇠에 고기를 쌓아 숯불에 굽는 케밥과 비슷하게 만들어집니다.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 그리스계 요리사가 터키에서 케밥을 빠르게 조리하기 위해 우리가 흔히 본 그 기계를 고안해 냈습니다. 이후 수직으로 길게 고기를 쌓아두고 요리를 하는 지금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은 이 요리를 보고 그리스 사람이 만든 요리기 때문에 그리스 음식이며, 케밥이 아닌 기로스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터키 사람들은 터키에서 만들었고 터키식 음식이기 때문에 터키 음식인 케밥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두 음식은 우리 눈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두 음식을 두고 보면 다른 점이 보입니다. 우선 제일 크게 눈에 뜨는 점이 바로 그리스식 빵인 피타 빵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쫄깃한 빵 덕분에 고기와 함께 먹으면 씹는 맛이 살아있는 피타 빵에 소스도 자지키라는 요구르트 소스를 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서는 먹지 않는 돼지고기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케밥과는 다른 자신들의 고유한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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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기를 먹으니 입에서 고기 향이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만 먹어도 배부르지만 고기의 맛을 더 느끼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일단 저녁을 위해 입맛만 다시고 길을 나섰습니다. 길 건너 골목길의 가로수가 울창해 뭔가 걸어보고 싶게 생겼습니다. 모르는 동네로 들어간 것이니 혹시 몰라 가방을 손에 꽉 쥐고 걸어갔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푸른 가로수가 울창합니다. 은행나무나 벚나무가 가득한 우리나라 가로수와 다르게 오렌지가 가득합니다. 지중해 기후의 아테네의 향기가 물씬 납니다. 푸른 나뭇잎 사이에 먹음직스러운 주황색 오렌지가 탐스럽습니다.


골목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알지 못하는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지도를 봐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길을 잃었습니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다 보니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낯선 곳의 두려움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걸어가지만 왠지 모를 경계심이 조금 생겼습니다. 뒤섞인 두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흥미롭게 동네를 구경하지만 가방은 꽉 끌어안고 걸어 다녔습니다. 다행히 걷다 보니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보이고 사람들이 서서히 많이 보입니다. 아무 생각 없으니 오히려 길이 생겼습니다.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앞의 레스토랑 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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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어 다니다 보니 아까 먹은 기로스가 벌써 다 소화되었나 봅니다. 주변 레스토랑에서 풍겨 나오는 다양한 음식 냄새에 벌써 배가 고파졌습니다. 관광지에 있는 식당이다 보니 가격대가 조금 높지만 안전하게 아테네에 온 것을 자축하기로 하고 들어가 파스타를 하나 주문했습니다. 깔끔한 레스토랑에 친절한 종업원까지 딱 관광지에 어울릴만한 식당입니다. 그리스식 음식보다 관광객에게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팔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찾기 어려운 그리스 음식이 아니라 평범한 파스타를 먹어서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식전 빵을 먹는 순간 그런 아쉬운 마음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올리브를 갈아서 만든 중후한 소스에 빵을 찍어 먹으니 지중해의 향기가 입안에 넓게 퍼져 나갑니다. 파스타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뙤약볕이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지중해 기후답게 토마토소스도 새콤하면서 깊은 맛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말린 토마토가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토마토와 다르게 건포도 같은 식감이지만 토마토의 정수가 담겨 있듯이 씹는 순간 단 맛과 새콤한 맛이 함께 나옵니다. 말린 고추처럼 생겼지만 맛은 정 반대입니다. 감칠맛이 살아 있습니다. 그릇까지 긁어먹을 기세로 이 그리스가 가득 담긴 파스타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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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새파랗던 하늘에 조금씩 주황빛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빛이 나게 서있지만 내일 둘러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걸어 봅니다. 맛있게 먹은 저녁식사를 뒤로하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걸어 다니며 기념품 상점을 돌아다니며 구경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훌륭한 그리스 식단을 맛봐 아테네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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