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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으로 완성되는 신전

그리스 여행기 -7

by 박희성

저 멀리 언덕 위에 아크로폴리스가 빛을 내며 서 있고, 골목마다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하던 유적들이 있습니다. 아테네는 모든 도시가 유적지인 기분입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박물관에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만나던 그리스-로마 신화가 이 도시 곳곳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부서져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끝부분에는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이 스며있는 기둥들은 그때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간직한 채 누워 있습니다. 어떤 건물의 잔해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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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다 있는 유적지를 지나면 어디에나 기념품 상점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라는 확실한 셀링 포인트가 있는 도시라 그런지, 기념품들도 다양합니다. 아크로폴리스 뱃지나 자석부터, 청동 유물처럼 생긴 고대 그리스 투구와 기마상까지 가지고 싶은 욕심이 가득 생깁니다. 사실 여행을 떠나 만나는 모든 도시에서 기념품들은 여행자들을 유혹합니다. 아기자기한 작은 장식품부터 거대한 조각상, 혹은 그 나라의 문화가 담긴 특색 있는 기념품까지. 언제나 기념품을 사고 싶었지만 여행이 긴 만큼 유혹은 이겨내느라 고생했습니다. 하나씩 사다 보면 후에 무겁거나 망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여행지에 도착했으니 기념품을 조금 사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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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가며 여행 중 처음으로 쇼핑을 하는 기분을 냈습니다. 가방에 하나씩 쌓여가는 기념품에 흐뭇해집니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골목이 끝나고 대로변이 나왔습니다. 눈앞에는 무언가 거대한 유적지가 나왔습니다. 드디어 제우스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다 무너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초라한 신전이지만 아직 그 웅장한 기운은 남아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길을 건너서 제우스 신전으로 다가갔습니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데 입구에 매표소가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주섬 거리며 돈을 꺼내려 하지만 갑자기 경비가 소리를 치며 사람들에게 무언가 알립니다. 이제 해가 지니까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인가 하고 들어보지만 그리스어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옆에 사람들은 경비의 말을 듣고 뒤돌아 가지 않고 오히려 신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물어보니 이제 입장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전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손에 쥔 돈은 다시 주머니에 넣으라고 하며 쾌활하게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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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안과 밖은 모두 무너진 파편들이 널려 있습니다. 파편이라고 해도 족히 1미터는 넘는 크기입니다. 신전의 기둥으로 다가가니 그 크기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습니다. 기껏해야 높은기둥이라 큰 감흥이 없을 줄 알았지만 어린 왕자의 바오밥나무처럼 거대한 크기는 압도적인 힘을 느끼게 해 줍니다. 돌기둥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등장한 상상의 제우스 신전은 그 이름만큼 웅장하게 다가옵니다. 기둥의 끝에는 아칸서스 잎을 딴 코린트 양식의 전형적인 장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인간이 만들었다는 건물인데 이처럼 정교하고 거대하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제우스 신전의 기둥은 원래 104개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16개만 남아서 작은 성당의 크기로만 보이지만 로마 시대 완성되었던 모습은 그리스 최대의 크기의 신전이었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복원 중이지만 이전의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완성된 제우스 신전의 웅장함을 직접 느끼지는 못할 듯합니다. 이 신전을 위해서라도 120살 넘게 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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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반사하는 제우스 신전의 빛깔은 서서히 노랗게 물들어 갑니다. 태양을 닮아 웅장하고 몽환적인 기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 바퀴 걸어보니 무너진 채로 쓰러져 있는 기둥이 있습니다. 쓰러진 기둥을 보니 마치 김밥처럼 잘려 있습니다. 저 큰 기둥을 그대로 조각해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잘린 김밥처럼 나눠진 둥근 원통을 쌓아 올려 기둥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모든 건축에는 이런 비밀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신전 주변의 파편에 그려진 부조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 사이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 늦어 어두운 밤길을 두려워하며 걸어가기 전에 서둘러 신전을 빠져나왔습니다. 한때는 거대하고 웅장하게 제우스를 모시던 신전이 이제는 화려한 영광을 잃었을지라도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는 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인자하게 인사를 건네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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