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여행기 -12
아고라를 나오는 순간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햇빛은 아직 강렬하지만 시계는 벌써 5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아고라 앞에 즐비한 레스토랑 중 하나에 들어가 마지막 만찬을 즐겨봅니다. 신선한 바질 향이 은은히 퍼지는 파스타와 빵에 찍어 먹는 요거트인 자지키가 그리스에서 마지막 식사입니다. 바질이라는 향신료의 독특한 향과 올리브 오일이 함께 어우러져 파스타는 입안에서 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거트로 만든 자지키를 빵에 찍어 먹어 입안에 남은 그리스를 지워보려 하지만, 새롭게 들어온 그리스의 향이 자리 잡습니다.
숙소로 들어와 짐을 싸면서 마지막 뒷정리를 시작합니다. 내일 새벽이면 이 공항으로 가는 택시가 올 예정입니다. 짐을 싸기 위해서 수개월 동안 굴러다니며 고생한 캐리어를 한번 쓰다듬어 봅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짐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나무에 나이테가 쌓이듯이 수개월의 추억들이 하나씩 쌓여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산 마트료시카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배지들. 그리고 폴란드의 스노우볼과 체코에서 마신 맥주의 병뚜껑 등등 쌓여있는 추억들은 하나씩 머릿속에서 재생됩니다.
여행은 드디어 끝났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여행만큼 느낀 감정도 다양합니다. 처음 러시아를 밟았을 때의 두려움, 헝가리에서 느낀 아쉬움, 플리트비체의 행복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여행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나한테 이런 감정들이 있었는지도 까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집에 앉아만 있을 때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친구 중 한 명은 여행을 싫어합니다. 친구가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며 한탄을 할 때 여행을 가 보라는 말을 무심코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냥 싫은 거야. 이유가 없어. 근데 남들이 내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는 그 시선이 더 싫어. 그러면서 남들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야 한다는 이유가 더 싫어."
여행이 싫다는 것인데 이유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왜 여행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다양한 감정들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하기 전에는 기쁘고 화나고 사랑하고 즐겁고 슬프다는 모든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탄만 하던 감정에서 내가 살아있는 존재였다고 느껴질 정도의 다양한 감정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마치 처음 여행을 갔던 기분처럼 들떠서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여행을 가는 기분입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부터 다시 캐리어를 만지작거립니다. 더 이상 짐을 싸야 되는 것은 없지만 괜히 두고 가는 짐이 없는지 둘러봅니다. 놓고 가는 물건은 없지만 여기에 나를 두고 가고 싶은 듯합니다. 떠나는 설렘과 더 여행하고 싶은 복잡한 마음이 뒤엉켜 있는 사이 택시가 도착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아침부터 분주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저도 분주한 한국에서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