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여행기 -11
늦겨울의 러시아에서 출발한 여행은 어느덧 반팔이 어울리는 계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관광 코스인 아고라로 가 보았습니다. 가는 길에는 넓은 공원이 있습니다. 국립정원이라고 불리는 넓은 공원은 길목 사이마다 푸른 나무와 새들이 가득합니다. 자페이온이라는 올림픽을 위해지었던 노란 건물을 지나면 이렇게 보랏빛 가득한 라일락 꽃이 동굴처럼 양 옆으로 서 있습니다. 뜨거운 햇살은 쏟아지고 봄과 여름 그 중간 어느 사이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고라로 가는 길마다 이름 모를 유적 천지입니다. 눈을 어디로 봐도 유적지입니다. 서양 문화의 발원지라 그런지 몰라도 땅을 파는 족족 유적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경주에서도 공사를 시작하면 유적이 나와 공사가 진척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작은 돌 하나도 세심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땅 속에 숨어 몇 천년 간 지내다 현대에 와서 빛을 본 듯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고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스어로 고대 집결지라는 뜻의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이던 회의 장소였습니다. 도시에 관한 다양한 현안이나 의회의 연설, 혹은 철학적 상념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던 공간입니다. 나중에는 이런 토론적인 공간을 넘어 운동경기나 문화 행사 같은 다양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고라는 단순히 넓은 광장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아탈로스 스토아라는 기둥이 늘어선 복도도 있고, 콘서트 홀과 같은 아그리파 음악당, 그리고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비롯한 다양한 제단이나 신전들이 즐비합니다.
가장 먼저 아고라 출입구 가까이 있는 아탈로스 스토아에 가 봅니다. 아테네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복원이 끝난 고대 그리스의 건물로 당시의 그리스의 분위기를 웅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기둥머리가 없는 도리아식 기둥과 양머리 같은 기둥머리를 가진 이오니아 식 기둥이 혼재되어 있는 이 건물은 네모 반듯해 기하학을 몸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수학과 건축을 몰라도 건물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예전에는 상점으로 쓰였다는 이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목이 날아간 조각상들과 얼굴만 남아있는 조각상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가면 이 아고라의 과거의 영광을 흰 석고로 만들어 둔 장식장이 있습니다. 이 건물 하나로도 웅장함을 느끼지만, 이 모든 공간이 완성되었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쉽게 유추되지 않습니다. 아마 모든 건물들이 이처럼 희고 반듯해 뜨거운 태양을 반사하면 눈이 부시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스토아 밖으로 나오면 역시나 햇살에 눈이 먼저 감깁니다. 다행인 점은 현대의 아고라는 마치 숲처럼 나무들이 즐비해 그늘로 들어가 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잠시 나무 밑에 앉아서 땀을 식히고 주변을 돌아봅니다. 무너진 돌 사이로 새들이 무언가 주어 먹고 있습니다. 푸른 나무들이 가득한 숲 위로는 아크로폴리스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옆에 있는 아고라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높은 돌산과 아크로폴리스가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는 동안 어제 가까이서 본 아크로폴리스를 원경에서 가만히 지켜봅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태양을 받아 빛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헤파이스토스 신전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신전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모습을 하는 헤파이스토스는 대신 찾는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신들에 비해 밀려나 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제우스나 아테나를 위한 신전들은 무너지더라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다니고 복원을 위해 분주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관광 자원으로 수많은 홍보를 통해 사람들을 끌어옵니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 신전은 크기나 명성이 초라해 잊힌 신전 같습니다. 빛나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때가 타고 이끼가 생긴 벽에는 곰팡이도 자라고 잡초도 퍼져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싸늘한 기운이 몸을 감쌉니다.
신전의 주인도 신화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지만 절름발이와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헤파이스토스는 신들의 주 무대에서 활약하기보다는 대장장이로 일만 열심히 하는 신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다 보니 주목받는 경우도 드물고 오직 자신의 작업 환경에서 열심히 일만 합니다. 화려한 삶이 아닌 평범하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때문인지 오히려 다른 화려한 신들보다 더욱 정감이 갑니다. 아마 우리의 평범한 삶과 닮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우리와 닮은 듯한 신전을 떠나고 아고라를 빠져나왔습니다. 드디어 아테네에서의 모든 관광이 끝이 났습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여행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젠 다시 헤파이스토스처럼 주어진 삶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헤파이스토스에게도 신전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추억이라는 것이 있으니 살다가 힘들어지면 다시 이 여행을 되돌아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