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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Jan 08. 2021

사라지는 내 고향 구리시와 골목이라는 작은 사회

유지되는 전통에는 사회와 삶도 포함된다.

 내 고향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버겁다. 어린 나이인지라 고향이라는 절절한 단어에 담긴 깊은 뜻을 느끼지 못해서인지 고향이라는 단어는 내겐 너무 무거워 보인다. 혹은 타향살이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없었기 때문일 수 있겠다. 뭔가 고향이라고 하면 시골같이 변하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편협한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고향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가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선산이나 집안 소유의 넓은 밭의 시골이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고향이라는 말에 담긴 사전적 정의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였다. 고향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곳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렇게 따지면 나의 고향은 분명히 구리시다. 정확히 하자면 구리시 인창동.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군 입대와 장기 여행을 제외하고는 이 작은 도시를 떠난 적이 없었다. 고향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정의도 존재한다. 언제나 우리 집은 구리시에 있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떠오르던 곳이 이 동네니, 그럼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리시, 특히 인창동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동네이다. 요즘 세상에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근교에서 이런 변화가 없는 도시가 없긴 하다. 5년 단위로 바라봐도 작은 건물들은 사라지고 크고 높은 빌딩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시외로 나가려면 버스밖에 없던 동네들도 이제는 웬만하면 지하철 하나씩은 있다. 우리 동네도 이런 도시적 변화는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아니 내가 어릴 적인 20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과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집 근처에는 오수가 흐르던 작은 굴도 있었고, 기차역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청량리발 기차들이 매 시간마다 지나갔다. 말 그대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잘도 자던 아기였다. 동네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엘리베이터가 존재하는 건물은 없었다. 우리 집도 5층 빌라였는데 동네에서는 꽤나 고층이었다. 대부분의 작은 연립 주택들은 8,90년대 유행하던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거칠고 붉은 벽돌로 3층 내외의 건물들의 연립 주택들 사이에는 2층에 마당 있는 단독 주택들도 종종 서 있었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는 슬레이트 판이 대충 올라간 작은 공장들이 들어섰다. 무질서 속의 질서, 불협화음 속의 하모니 같이 동네에 어지럽게 펼쳐진 집과 건물들 사이에는 골목이 있었다.


 골목은 살아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던 골목 안 방앗간은 경로당이었고, 할아버지들이 장기와 바둑을 두시던 낡은 의자들은 기원이었다. 앞을 터서 온갖 물건들을 늘어놓고 팔던 문방구는 동네의 작은 신문사처럼 언제나 각종 소식을 전파했고, 모래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놀이터는 어린이집이자 유치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우리의 하루도 골목에서 시작해 골목에서 끝났다. 해가 지기 전까지 최대한 놀아야 하기 때문에 밥 먹고 나면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우선 골목으로 달려 나갔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이 없었지만 그냥 발이 이끄는 곳으로 가 보면 친구, 동네 형 누나, 어린 동생들까지 모든 또래들이 다 모여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다 같이 그 집 앞에 몰려가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거나 어른에게 싹싹한 형이나 누나가 부모님께 “ㅇㅇ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렇게 모인 우리의 나이 대는 천차만별이었다. 적게는 누나 따라온 4살부터 많게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까지 다 같이 모여 놀았다. 축구공 차다 무서운 사장님이 있는 작은 공장 위로 공이 올라가면 몰래 공을 꺼내기 위해 갖은 수를 쓰기도 했고, 놀이터에서 각자 그룹화되어 오늘 하고 싶은 놀이를 따로 하기도 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하던 놀이로 슬금슬금 다시 모이기도 했다. 놀다가 할머니들 모여 있는 방앗간을 지나갈 때면 각자의 할머니들에게 들렸고, 누구네 엄마가 간식을 해 두었다고 하면 다 같이 몰려갔다. 골목은 일종의 생활 공동체이기도 한 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골목의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도시에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며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아니, 재개발이 진행 예정이 되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우리도 역시 할머니 댁에서 분가하여 옆의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 원래 살던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라 불과 1km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덕분에 도시 전체가 변하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름도 까먹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제일 친했던 친구네 집이 먼저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지금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목사님 아들이 살던 교회 겸 집은 진작에 건물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리더십이 있어 잘 따라다녔던 누나의 집은 재개발 소리만 20년째 반복하다 이제야 철거를 시작했다. 도시의 인구는 많아졌지만 알던 사람들은 적어지면서 골목은 해체되었다. 우리가 놀던 골목도 재개발 B구역이라는 이름이 지어졌고 가로등조차 꺼진 채 남은 철거민들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울 공화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서울 중심에 자리 잡을 여력이 없으니 서울 외곽으로 빠지고, 그곳조차 집이 부족해지니 구리를 포함한 수도권으로 퍼져 나갔다. 종이에 물 스며들 듯 자연스럽고 빠른 속도였다. 연립주택, 단독주택, 판잣집, 슬레이트집 같은 다양하게 난립한 미로 같은 동네는 이런 빠른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재개발 구역으로 꾸준히 변화하였다. 풀이나 나무들이 여기저기 규칙 없이 자라고, 사람들이 오가며 발로 만든 흙길뿐이었던 야산 같았던 마을이 계획적이고 기하학적으로 심어진 나무와 꽃이 심어지고, 온갖 장비를 동원해 만든 산책로를 가진 공원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동네 뒷산이 깔끔한 공원으로 바뀌기도 했다.)




 발트해부터 지중해까지 동유럽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을 갔었다. 러시아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를 거쳐 지중해의 그리스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종단 여행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 일정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도시를 바꿔가며 이동해야 했다. 이렇게 이동하는 여행을 하다 보니 동유럽 국가들의 특징이 눈에 보였다. 모든 시내는 구시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구시가지를 기준으로 신도심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취한 도시들도 있었다.


 분명 2차 대전에 무너진 건물들이 태반일 것이고, 사회주의 시절 대체된 건물들도 많다. 그래서 이후에 구시가지 자리를 복원한 폴란드 바르샤바와 같은 도시들도 있었고, 수 백 년 전부터 큰 피해가 없어 조금씩 보수와 수리만 지속한 도시도 있었다. 복원이나 유지를 통해 오래된 건축 양식을 보존해 과거의 흔적을 유지했다. 그런 유지된 구시가지가 도시마다 있다는 점은 모든 국가들의 공통점이었다.


 신기한 점은 복원된 건물들을 그냥 문화재로 남겨둔 것이 아니라 건축물로 이용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직접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구시가지라는 말도 사실 과거 한 때는 사람들이 직접 살던 도시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들이다. 오래된 건물은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되도록이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구시가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건물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건물을 아우르는 구시가지는 그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살아갔다. 오래도록 이어 내려온 건물에 살면서, 그들은 그 안에서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식당, 약국, 은행과 같은 다양한 서비스들이 전통 건물들을 통해 제공되었고 사람들 또한 그 안에서 먹고 자고 하는 삶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삶을 구시가지에서 이어가는 사람들에겐 골목이 존재했다. 쓰레기통만 덜렁 존재하는 그런 아스팔트 위의 후미진 골목이 아니었다. 구시가지의 골목은 단순히 골목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유지되는 사회를 말한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그 골목 사람들과 비슷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이익 관계보다는 친분 관계로 이루어지다 보니 마치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들로 가득 찬 사이였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유럽이나 사회관계 속의 사람은 마찬가지였다. 정을 나누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모두의 마음속에는 정이 있다. 유리와 벽으로 차단된 아파트와 신시가지에는 없는 풍경이 이곳 구시가지에는 아직 남아 있다. 같은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차단되어 나누어진 공간 속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골목처럼 공간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것이 사람이다. 


 도시민 전체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어도, 적어도 집 주변의 사람들과는 인사할 수 있는 그런 생활 공동체적 사회는 구시가지의 공간을 통해 유지되어 왔다.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뿐만 아니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그들의 전통은 결국 오래된 건물 하나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안에 살아가는 삶을 통해 사람 간의 관계 또한 전통인 셈이었다.




 언제나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이라고 하면 한옥만 떠올렸다. 하지만 한옥뿐만 아니라 재개발로 사라지는 골목이라는 공간들도 사라지는 전통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골목 사이에서 살아가던 사람과의 관계들 역시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우리의 삶이었다. 서로 가까이 지내는 골목이라는 사회도 전통으로 여겨져 유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오래된 것들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은 아니다. 재개발이라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단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이기적인 아쉬움으로 투정을 한 번 부려본 것이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잊혀 가는 골목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다. 고향에 살면서 떠난 적이 없는 데도 고향이 사라지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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