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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Jan 25. 2021

여행을 막는 자 vs 여행을 추천하는 자

우리는 단편적인 경험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인도를 간다고 말하니 주변 사람들 모두가 위험하다며 합심해 뜯어말렸다. 세상에 위험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지는 몰랐다. 친구들은 인도에서 일어난 폭행, 강간, 살인 등 강력 범죄를 보여주며 이런데도 가고 싶냐며 핀잔을 주었다. 수의학을 공부하던 친구는 장티푸스, 이질 같은 질병이나 기생충의 위험을 매일마다 되새기며 여행을 막았다. 부모님도 인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시위나 중국, 파키스탄과의 분쟁을 열거하며 여행을 반대하셨다. 


 인터넷에 올라온 인도에 대한 글들은 더 비관적이었다. 위험하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로 매일 마다 사건이 멈추지 않고 터지는 소돔이자 고모라였다. 유황불이 떨어지기 직전의 인도에 대한 부정적인 글들은 차고 넘쳐났다. 이런 모습들만 보면 인도는 지상 최악의 국가로 이 정도면 사업을 제외한 전 국민의 인도 출입을 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들어보면 인도만큼 매력적인 여행지가 없다. 거대한 땅덩이만큼 다양한 기후가 분포되어 있어서 히말라야 같은 고산지대, 갠지스강 유역의 하천 지대, 뭄바이 같은 인도양… 심지어는 사막이나 정글도 만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융광로처럼 다양한 문화들이 한데 섞여 신비함으로 다가온다. 이런 인도의 풍부한 관광 상품들은 언제나 여행자들을 유혹했다. 가히 여행자들의 성지이자 배낭여행의 메카라고 볼 수 있다. 인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은 또다시 인도로 발길이 향하는 경우가 많다니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마성의 국가인 셈이다.



 언제나 인도 여행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극단을 달린다. 그래서인지 인도를 간다고 하니 말리는 사람과 추천하는 사람들이 나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행을 말리는 사람은 인도 여행의 멋진 부분이나 환상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반대로 여행을 추천하는 사람도 인도의 치안이나 안전 문제에 대해 크게 경고하지는 않았다. 위험할 수는 있다는 말은 건네도 구체적인 치안의 정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경험으로 축적된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경험에 반대되는 경험을 인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단편적인 모습으로 평가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알량한 충고라는 이름으로 그 절반에 미치지도 못하는 측면의 경험으로 세상을 반쯤 가리고 살아간다. 이런 말을 하는 나 역시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결말이 두 개로 되어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문단을 건너뛰어도 좋다.) 좀비가 창궐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주인공인 샘은 홀로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이어간다. 의학 전문가였던 샘은 낮에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을 이어가고, 밤에는 포획한 좀비로부터 바이러스 치료제를 연구한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있는 생존자들을 안전한 자신의 보금자리로 데리고 오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보낸다. 다행히 이든과 안나라는 어린 꼬마와 젊은 여성이 샘을 찾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좀비들은 이들의 근거지를 알아내 급습하고, 샘은 어쩔 수 없이 바이러스 치료 효과가 있는 샘플을 안나에게 건넨다. 그리고 이든과 안나를 버몬트에 있는 생존자 캠프로 보내고 자신은 좀비들과 싸우며 시간을 벌어주다 장렬히 산화한다. 


 비슷한 시기 이 영화를 본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주인공이 죽는다는 충격적인 결말 덕분에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더욱 뇌리에 꽂힌다는 말을 꺼냈는데, 친구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주인공은 살아있었고 이든과 안나와 함께 생존자 캠프로 떠났다는 것이다. 순간 친구가 영화 마지막 부분까지 보다가 졸았나 싶었다. 바로 전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내 기억이 더 확실하다 여겼고, 결국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보다는 결말에 대해 목청 높여 이야기하다 말싸움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굳이 싸울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어린 시절 내가 본 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결말이 두 가지였다. 내가 본 버전은 극장판이었고, 친구가 본 버전은 감독판이었다. 서로 같은 영화를 봤지만 다른 결말만 생각한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전체적인 메시지로부터 받아들이는 방향 자체가 달랐던 것이었다. 우리는 평행선 위에서 싸우고 있었다. 


 같은 영화에 다른 결말만 두고도 이렇게 다른 말이 나온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제들로 논쟁을 할 때도 이렇게 서로 다른 측면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다른 방향의 논쟁들은 결국 발전 없는 감정 소모의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라고 철썩 같이 믿는 바람에 타인의 시선은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일부 만으로 전체를 판단해 자신의 시선으로 재단한다.


 때문에 사람들의 충고를 받아들일 때 한쪽으로 치우쳐서 듣게 된다면 포기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여행을 넘어 취업, 이직 혹은 결혼이나 자식 교육과 같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충고를 듣는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측면으로만 이야기를 듣게 되고, 다른 부분에 대한 파악은 쉽게 포기한 채 단편적 경험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단순히 “나 때는 이랬다.”라는 말이 바로 꼰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경험해 봤으니 무조건 그건 내 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 경험의 공유를 꼰대로 바꾸는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된다.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귀납법은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미 일어난 경험이나 시선이 있으니 반드시 틀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시야를 닫아버리는 문제가 생기니 문제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단편적인 시선만으로 포기하기에는 이 세상에 아쉬운 것들이 더 많다. <나는 전설이다>는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니 훨씬 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출발한 인도에서는 다양한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많은 여행자들이 말하듯이 감동적이거나 감명 깊은 순간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세상은 어두운 측면이 있는 만큼 밝은 측면이 존재했고, 밝아 보이지만 어두운 면도 존재하듯이 모든 경험은 이분법의 면이 아니라 다차원의 세계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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