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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Feb 01. 2021

감성 에세이를 위한 변명

위로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수년 전 뉴질랜드 웰링턴에 있는 고서점을 방문했다. 책을 고르거나 무언가 사겠다는 생각보다는 고서점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들어갔다. 갈색 나무로 된 낡은 외벽과 빛바래 희미해진 간판의 꾸덕한 분위기가 좋았다. 한낮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점은 어두컴컴했다. 덕분에 주광색으로 빛나는 램프 모양의 등이 더욱 서점을 고풍스럽게 만들었다. 좀 먹은 듯한 쾨쾨한 냄새는 고서점만의 특징이다. 평소에 곰팡이 슨 듯한 이런 냄새를 맡으며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이상하게도 헌 책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 쾨쾨함이 반갑기도 하다.


 책은 당연하게도 모두 영문으로 되어 있었다. 제목만 보더라도 다양한 책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냥 영어로 된 고서적 하나 정도 집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골랐다. 온 김에 이런 인테리어 소품 하나 챙겨간다면, 그리고 혹시 나중에라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영어 실력이 된다면 좋을 듯했다. (아쉽게도 아직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제목만 보고 책을 고르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특히 제목이 주는 뉘앙스에서 나오는 기운을 짧은 영어로 파악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서점 주인에게 베스트셀러를 물어봤다. 머리는 벗겨졌지만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서점 주인은 안쪽 높이 쌓인 책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점임에도 베스트셀러가 없다고 한다. 그냥 주인이 보고 재밌는 책이 가장 많이 들어오고,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전시되는 형식이었다.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어떤 책들은 수 년째 바뀌지 않고 꾸준히 로열 층에 전시되기도 했다. 일종의 독립 서점이었다. 이제는 독립 서점이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하지만 아직 독립 서점 붐이 오기 전이었기에 당시에는 이런 색다른 서점 방식이 신기하기만 했다. 




 얼마 전 동네에 있는 오래된 서점에 여행 관련 코너가 사라졌다. 코로나의 여파인지 3미터가량 되던 여행 매대는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반절 남은 매대에도 국내 여행 가이드북과 요즘 유행하는 차박 관련된 서적들만 올려져 있었다. 여행 에세이나 여행기 같은 책들은 매대 진열대에서 이젠 쫓겨나 벽에 있는 책꽂이로 옮겨졌다. 예전에는 매대 위에 여행 에세이 분야만 따로 존재했지만 벽 쪽 책꽂이로 옮겨진 이후에는 그냥 에세이로 통칭되었다. 여행 관련된 서적을 찾으려면 제목을 봐 가며 일일이 책을 들여다보며 찾을 수밖에 없어졌다. 코로나가 수많은 산업들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불러왔지만 서점가 또한 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여행기인 만큼 이렇게 사라지는 여행기, 여행 에세이들이 아쉽기만 하다. 


 뉴질랜드의 고서점과 같은 독립 서점들과 다르게 조금 규모 있는 서점들은 이렇게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베스트셀러의 변화를 추구한다. 책이라는 물건이 주는 이미지는 정적이고 고요한데 반해 서점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며 바뀐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서점은 사회 트렌드의 선두주자이다. 뉴질랜드의 고서점처럼 책을 쌓아 두고 자신이 원하는 책 위주로 판매하는 서점은 흔치 않다. 그러니 우리는 기본 방식에서 떨어진 “독립서점”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서점은 트렌드 세터는 아니더라도 트렌드 팔로워는 돼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산업 분야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출판 업계는 특히 사회 트렌드와 대세를 따라야 한다. 이제는 책이라는 매체가 사람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는데 사회의 트렌드조차 따라가지 못한다면 산업 성장이 아닌 유지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점가의 책들을 살펴보면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읽어진다.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는 주식에 관련된 책들이 서점에 가득하다. 유튜버의 환상이 가득한 시기에는 유튜버에 대한 책, 유튜브 제작에 관한 책, 유튜브 마케팅에 관한 책들이 서점을 장악했었다. 물론 해외여행이 성장하던 시기에는 여행에 관한 책들이 인기였다. TV에 명사가 나와 인기를 끈다면 그 사람이 언급하거나 집필한 책들이 가득이었다. 


 부정적인 현상까지는 아니다. 트렌드를 따라가야만 살아남는 정글 같은 자본 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출판업이 날로 갈수록 힘들어지는데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작아지는 산업 안에서 최대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트렌드와 사회 현상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인가 한동안 공부나 일이나 어딘가에 미쳐야 한다던 책들이 서점가를 장악했던 시기도 있었다. 10대는 공부에 미치고, 20대엔 외국어에 미치고, 30대, 40대에는 주식, 커리어 등 다양한 방면에서 미쳐야 했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칭송받고, 조금이라도 채찍질을 멈추면 도태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그러다 보니 일단은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들이 쏟아져 나왔다. 열정, 노력, 열심 같은 단어들이 서점가를 장악했었다. 열심히 하는 자들에게는 성공이라는 보상이 당연히 떨어지니 나만 잘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던 책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요즘 서점가의 트렌드는 정반대이다. 대부분의 책들이 위로, 안정, 극복과 같은 노선을 타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탓인가 열정이나 노력보다는 안정적인 현재의 삶을 추구하는 책들이 늘어났다. 열심히들 노력했지만 노력의 결과와 성과가 기대 이하라 다들 힘이 드는가 싶다. 특히 스스로에 대한 위로를 위한 책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유명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오늘 하루도 괜찮다, 혹은 실수해도 괜찮다 같은 채찍보다는 쉬어 가는 분위기가 서점가에 가득하다. 




 하지만 이런 누워서 쉬는 분위기의 책들에 ‘불편한’ 사람들이 다소 있었다. 서점에 온통 드러누워 있는 책들 뿐이니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서점 분위기로 인해 읽을 만한 책들은 서가로 직행하고 매대에는 온통 감성 에세이뿐이라는 불만이었다. 그들의 불편함이 이해는 된다. 집약된 정보를 얻고 사유를 하는 목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겐 이런 서점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감정에 치우쳐 있는 에세이 장르가 독식하는 매대들이 싫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받은 상처의 종류가 다양하듯 위로의 방법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술로 사람으로 받은 상처를 덮어 씌운다. 내겐 여행이 정신적인 안정 제이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이런 감성 에세이가 위로가 된다. 시를 읽고 눈물이 나듯이 공감되는 따듯한 글들도 필요한 셈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에세이들이 편향되어 쏟아지는 이유를 출판업계와 독자에게서 찾지 말고 사회에서 읽어내야 한다. 


 책은, 아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누군가 필요하니까 탄생한다. 그리고 생산되는 콘텐츠가 주류가 된다는 것은 사회 현상들과 떨어뜨릴 수 없다. 감성 에세이들만 탄생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책이 필요하기 때문인 셈이다. 지금도 수많은 글들이 서점 판대에 오르기 위해 쓰이고 있는 이유도 누군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런 감성 에세이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회 분위기가 또다시 바뀐다면 다시 다른 장르의 책들이 생겨날 것이다. 위로를 해 주는 감성 에세이가 서점을 장악한 것은 그만큼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사회에 많고, 위로가 되는 글들로 그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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