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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성 Feb 10. 2021

분노에 휘둘리는 중생

뉴질랜드에서 노숙하기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화가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껏 여행까지 가서 화를 내는 내 모양새가 우습긴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돈 들이고 시간 들여 떠난 여행인데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심지어 그 틀어진 계획도 내 탓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짜증이 배가 된다. 화가 나는 건지 짜증이 나는 건지 뭔지 모를 불쾌한 감정은 결국 여행을 망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소한 이유 때문에 준비한 여행이 망쳤다는 생각은 불난 마음에 기름을 붓는다. 그래서인지 매 여행마다 크고 작은 이유로 혼자 혹은 동행자와 화를 냈다. 첫 여행이었던 뉴질랜드에서 피치 못한 사정으로 노숙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 도움 주는 사람 없이 떠난 첫 여행이었다. 영어도 서툴고 혼자 영어로 외국인과 대화해 본 적도 없으니 긴장되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말도 잘 건네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 성격이니 긴장은 배가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 챙겨야 할 친척 동생까지 함께 가게 되어 출발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무거우면 철저히 준비해야 했지만, 오히려 여행 준비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설렘보다 긴장이 더 많은 여행이 압도했다. 여행지에 대한 공부도 전혀 하지 않았고, 숙소도 첫 도시인 웰링턴만 잡아두었고, 와이파이니 로밍이니 하는 휴대폰 데이터 관련된 준비는 하지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환전도 하지 못해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우왕좌왕하면서 준비를 하다 보니 부족한 것들이 많은 여행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이라도 그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었다. 사전 준비가 거의 없다 보니 만나는 모든 새로운 풍경들과 색다른 문화가 더 크게 다가왔다. 정보 과잉의 시대를 살다 보니 미리 만나보는 이색적 풍경이 도리어 여행지에서 가슴 벅찬 감동을 없애기도 했다. 머릿속에 여행지의 데이터가 거의 없었으니 여행의 감동이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적은 정보로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동이 많던 여행이라 여행을 하던 도중에 매번 새로운 숙소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하필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남섬 최대 도시에 도착했을 무렵 수일 전부터 방을 구하지 못했다. 오기 전까지 이동거리도 길었고, 인터넷도 없던 상황이라 방을 실시간으로 찾는 지금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간신히 잡은 와이파이로 방을 검색해도 거의 모든 방들이 예약되어 있었다. 


 결국 예약도 채 하지 못하고 크라이스트처치 기차역에 도착했다. 며칠간의 여행으로 여행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설마 이 넓은 도시에 방 하나 없겠냐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남섬 최대 도시니 크기가 큰 만큼 관광객도 많고, 그만큼 숙소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차역에서 나와 우리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유스호스텔인 YMCA로 갔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는 만실이라고 나왔지만 그래도 혹시 방이 하나라도 있지는 않을까 하며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방은 없었다. 이렇게 큰 호스텔에 방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행이 성공적이었으니 이번에도 성공하겠지 라고 오판했다. 


 하는 수 없었다. 미리 예약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점차 마음속에서 자라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숙소를 찾아 떠나야 했다. 도시 곳곳에 있던 호텔과 모텔, 게스트하우스를 모두 돌아다녀 봤지만 돌아오는 사인은 “No vacancy(빈방 없음)”. 이럴 수가 있을까. 2년 전 대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다 복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도시 절반이 복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관광객 수요만큼의 빈 방은 구할 수 없었다. 허망하게도 오늘을 제외한 다른 날들은 또 빈 방이 널려 있었다. 하필, 오늘. 단 하루만 이렇게 모든 숙소가 다 꽉 차 있었다. 


 시간은 점차 흐르고 거리에 사람들도 사라졌다. 방을 구하지 못할수록 동생과의 대화는 적어졌다. 방을 구하지 못한 좌절감은 짜증이 되었다. 눈썹을 잔뜩 구긴 채 인상을 쓰고 한숨만 하염없이 반복했다. 밤이 되니 거리에 술 취한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 여행에서 일어날 모든 불행한 상황이 한 번에 닥쳐왔다. 짜증과 두려움이 동시에 올라왔다. 결국 최후의 보루였던 노숙을 선택해야만 했다. 우리는 큐브 하우스라고 불리는 구역으로 몰래 들어갔다. 지진으로 도심이 사라지자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컨테이너 쌓아 둔 공간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한다. 남반구가 여름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운 밤까지는 보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10시가 되면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해가 사라지고 어두워지면 어디서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도심 한가운데 있었지만 야생 어딘가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진짜 노숙의 시작이었다. 벤치에 배낭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화가 난다. 준비하지 않은 나도 화가 나고,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나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 말 없는 동생에게도 화가 난다.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내 잘못이었고 화를 낸다고 이 상황에서 나아질 것은 없었다. 감정의 분풀이였을 뿐이다. 단전에서 끓어 올라온 기운이 목을 넘어 머리로 올라오자 뜨거운 열이 났다.


 화라는 감정은 한번 폭발하면 주체하지 못한다. 타인을 향하지 않는다면 나를 향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분노를 탐진치의 진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불교에서 사람은 깨달음을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알아간다. 이런 과정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으로 곧잘 비유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려 하지만 빛이 없다면 길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빛이 보이지 않아 힘든 삶을 살아간다. 빛이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탐진치 때문인 것이다. 


 어둠이 두려워 몸을 허우적거리다 넘어지면 중생은 화를 낸다. 분노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둠 속 모든 것에 화가 난다. 탐진치 중 진, 분노다. 분노에 빠진 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나와 부딪치는 모든 것들에 싸움을 걸면서 난폭하게 건다. 그리곤 화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는 나에게 그 분노의 화살을 향하기도 한다. 괴로움만 스스로 증폭된다. 이것이 분노에 빠져 늘어나는 괴로움을 인지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분노가 치밀기 시작하면 화를 낼 상대와 내지 말아야 할 상대를 구분하지 못한다. 방향을 잃은 분노는 나에게 향한다. 나를 향한 분노는 나를 갉아먹는다. 어차피 사라질 풍선 같은 화는 사라질 것이다. 남을 향해야 하는 화는 남을 향해야 한다. 방향성을 잃어버린 분노처럼 추한 것은 없었다. 


 여행을 왔지만 이를 망쳤다는 분노. 그리고 그 잘못으로 이런 위험에 처했다는 슬픔이 화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행은 끝나지 않았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분노를 없애기 위해 여러 설법을 펼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빨리 해가 뜨고 아침 일찍 여는 카페라도 가는 것뿐이었다. 


 동생과 말이 끊기고, 혼자 화를 삭이며 벤치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부끄러웠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나에게 화를 돌리기 싫으니 동생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렸고, 그러고 나서 그 분노가 나를 향하더니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분노가 괴로움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탓이다. 원인이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소모만 불러오니 분노가 끝나면 공허함과 허무함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허망함에 모든 것을 덧없이 느껴 의욕이 사라진다. 


 다행히 해가 뜨고 우리는 아침부터 여는 카페에 거지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바로 3일 치 숙소 예약을 모조리 마쳤다. 별 탈 없었고 졸린 것 빼고는 문제없었다. 체크인 시간 전까지 공원에서 또다시 노숙으로 낮잠을 잤다. 한번 해보니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체크인한 후 드디어 바라던 숙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힘들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고 이야깃거리가 되어 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생각보다 충격은 있었지만 생각보다 좋은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모든 부정적인 일이 부정적이지는 않다. 모든 긍정적인 일이 긍정적이지도 않다. 세상은 풍파가 있다. 파도의 파고만큼 올라가면 내려오는 삶을 반복한다. 그리고 파도가 덮칠 듯이 오면 어떻게 피할 것인지, 맞서 싸울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힘드니 단순히 화를 내는 것으로 피해 버렸다. 나에게, 세상에게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방향 없는 분노는 감정의 소모만 불러오고 나를 침삭 시킨다. 파도에 맞설 거면 맞서고, 피할 거면 피하면 된다. 나에게 향하는 화는 덧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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