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고독으로 홀로 된 나를 만나봐야 한다.
낮과 밤의 바다는 다르다. 바다는 낮 동안 따듯한 햇살로 행복을 끌어당긴다. 거친 파도가 오더라도 태양이 떠 있는 동안 바다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즐거움이 가득한 공간이 된다. 파도가 없는 잔잔한 날이라면 넓은 바다에 찬란하게 부딪치는 태양의 조각들이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옆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더욱 낮바다의 아름다움이 빛을 낸다.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이 파도보다 높은 소리로 웃고 떠든다. 한낮의 아름다운 바다는 여름, 겨울 따지지 않는다. 여름이면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시원함을 즐기고, 겨울이라도 차가운 해변의 광활하고 멋진 모습을 배경으로 모두 함께 웃고 떠든다.
하지만, 밤의 바다는 다르다. 바다가 낮 동안 주는 단어가 행복, 즐거움, 기쁨 같은 따듯한 단어들이라면, 밤의 바다가 가지는 단어는 외로움, 그리움, 잔잔함 같은 차가움을 내뿜는다. 태양이 주는 온도가 놀랍게도 사람의 마음까지도 변화시킨다.
하지만, 밤바다가 차갑더라도 그 단어들이 싫지는 않다. 낮 동안 푸르고 기분 좋게 일렁이던 파도는 검고 거칠게 모래사장의 적막을 깨뜨린다. 깨진 파도를 따라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면서 조용히 내면으로 들어간다. 특히, 혼자 온 바다라면 밤바다의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남들과 동 떨어진 해변 한 구석에 앉는다. 차가운 파도 때문에 음산한 바람이 슬쩍 불어오지만 홀로 남겨진 밤바다의 사람들은 외로움을 즐기고 있다.
조용히 밤바다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지내고 있어도 차갑게 식어버린 모래사장에 출렁이는 파도 소리는 고요한 정적을 수 초 간격으로 깨워준다. 깜짝 놀라 정신이 들면 주변에 함께 바다의 최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혼자 있더라도 혼자가 아닌 것 같고, 함께 있더라도 혼자 있는 듯한 오묘한 기분이다.
대부분의 바다로 떠난 여행은 무언가 내려놓기 위해서다. 삶의 지친 무게를 내려 놓거나, 어려운 인간 관계를 놓아 버리거나, 혹은 새로운 관계를 쌓으며 기존의 기억을 지워 버리고 싶은 사람들이 바다로 향한다. 그리곤 낮 바다에서 시원하게 쏟아버리거나 밤 바다에서 조용히 흘러 보낸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힘든 기억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낮과 다르게 더 깊은 내면에 있는 기억들은 조용히 혼자 녹여내야 한다. 외로운 시간이지만 검은 바다와 차가운 파도를 보며 조금씩 끌어내야 한다.
한참을 혼자 바다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해안을 따라 걸어본다. 파도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며 물을 머금어 단단해진 모래에 발자국을 남겨본다. 끝없는 파도는 초라한 내 발자국조차 씻어낸다. 내가 어떤 흔적을 남기더라도 파도는 금방 지워버린다. 바다와 함께하는 나만의 시간도 금세 사라져 버린다. 바다에 와서 외로움을 두고 홀가분하게 떠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로움은 여기에 두고 갈 수 없다. 파도가 지워버리는 순간의 감정이 아니다. 끝없이 다가오는 파도와 더 닮았다.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해변에 영원히 머무는 바다의 파도처럼, 외로움도 마음속에서 괴롭게, 때로는 아련하게 남아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결국 언제나 외로움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밤바다의 차가운 단어들이 싫지 않듯이 외로움이 언제나 힘든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니다. 차갑고 조용하고 긴 고독의 시간이지만, 거꾸로 다른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고 오직 나만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함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 있는 만큼, 혼자 있어서 조용히 쌓아가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마치 마음속의 소도와 같은 시간이다. 소도는 고대의 고조선 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공간이다. 신성한 공간인 탓에 죄인이 도망쳐 들어가도 잡을 수 없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소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에 독립적으로 소도는 안전이 보장된다. 외로움은 소도와 같다. 혼자 있어서 외롭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거꾸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내 내면에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그리고 외로워도 지나치지 않은 곳이 바로 밤바다다. 혼자 밤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시간은 바삐 돌아가던 뇌를 쉬게 하고, 들끓는 감정을 차분히 만든다. 누군가와 함께 밤바다를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좋다. 밤바다는 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터놓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둘의 이야기가 끝나 침묵이 찾아오더라도 파도가 싣고 오는 어둠 속의 소리는 둘 사이의 침묵을 묻어 버리고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한다. 그러니 혼자서 외로워도, 함께 있어도 외롭더라도 파도가 싣고 오는 고요한 외로움은 스스로 속을 다듬을 수 있게 해준다.
파도가 만드는 모래 위의 나이테를 보며 밤바다와 함께하는 외로움을 마무리했다. 떠나보낼 수 없는 애증의 관계지만, 그래도 외로워하는 나의 내면과 대면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 다시 외롭다고 극성을 떨겠지만 우선 오늘은 이렇게 조용히 외로움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