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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이 Sep 23. 2023

당신은 지금도 충분하다


 큰맘 먹고 가지치기해주었던 아보카도의 잘린 줄기 밑에서 아주 조그마한 새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잘린 줄기는 하얗게 말라 딱딱해지고 바로 그 아래에서 다른 방향으로 어린줄기가 자라나게 된 것. 막상 가지치기할 땐 처음이기도 하고 겁이 나서 웃자란 맨 위의 줄기만 싹둑 잘라냈었는데, 혹여나 죽을까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어리지만 단단한 줄기가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아, 생명의 힘은 실로 엄청나구나.’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눈이 없는 식물도 길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제 살길을 찾아 뻗어 나간다. 다만, 좀 더 아랫부분을 과감히 쳐냈어야 했는데 겁이 유독 많은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나뭇잎이 시작되는 부분 아래의 줄기가 또 너무 길게 모양이 잡혀버린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지금도 맹렬하게 자라나고 있는 새 줄기가 더 무거워지고 길어지면 아래 줄기가 힘없이 휘청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 한차례 또 근심이 생겼다. 아래를 더 잘라내야 할까…?


 지금 아보카도 나무 길이의 2분의 1을 더 자르게 되면 그땐 진짜 아보카도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만일 잘라버려야 한다는 답이 나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다시 싹둑 가지치기할 것 같다.


 식물을 처음 만지던 날을 떠올려본다. 이전 신문사에서 새로 만난 대표님의 요청으로 사무실 내 대형 식물들을 억지로 가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난 식물 가꾸는 맛을 알게 되었는데, 처음엔 그냥 시키니까 물을 주고 영양제만 꽂아주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회사 욕을 하며 물을 주더라도 말없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잎을 피워냈다. 사무실은 곧 정글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말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자기 열정을 다하는 식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난 그 식물들을 보며 위안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겐 보이지 않는 성과가, 내가 견디고 있는 시간을 식물들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도 티내지 않고. 그들과 나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무관심 속에서 우린 열심히 자라나고 있다는 것.


 난 때로 식물들과 이 공통점을 남몰래 마음에서 마음으로 공유하곤 했다.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사무실이 정글처럼 되어가도 자라나는 식물들에게 관심 따위는 없었다. 나도 그런 존재였다. 그냥 아주 작게 딸린 자회사에서 열심 다해 일하는 사람. 어떤 이들은 꽃이 피어나고 하나둘씩 잎을 내는 식물들을 보면서 내 솜씨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한낱 작은 사원도 돌아볼 줄 아는 이들이었다. 물론, 이제 회사 돌아가는 것을 알기에 관심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곳이 회사라는 걸 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냥 이 한마디를 외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지금도 묵묵히 제 할 일 다하고 있어요! 오늘 하루도 견뎌냈어요!


 

 아무도 듣지 않는 외침이기에 난 이제 나와 닮은 것들의 외침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외침은 나 같은 사람만 듣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를 막은 사람은 듣기 힘들고, 처음부터 귀를 열 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듣기 힘든 외침이다. 이 순리를 이해하기로 했다.


 아침마다 나는 내 아보카도 나무를 들여다보며 물을 주었다. 때로는 늦은 저녁, 집에 있다가도 옥상으로 올라가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서 아보카도를 비춰보기도 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다. 마음으로 모든 것을 느끼는 아보카도는 나를 알아들을 것이다. 내가 자길 보고 있다는 걸. 내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고 있다는 걸.



너 여기 있구나.

묵묵히 크고 있구나.

오늘 하루도 견뎌냈구나.



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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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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