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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버스 Oct 11. 2021

[중국] 패스트푸드 알바생

어린 친구에게 공짜로 밥을 얻어먹은 사연

2018년은 가히 크립토 2.0 세대의 해였다. 블록체인과 관련된 온갖 컨퍼런스가 전 세계에서 열렸다.

코인 좀 들고 있는 사람들, 코인 투자를 받은 회사들 덕분에 항공업계, 숙박업계가 호황을 이뤘을 정도였다.


전문가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명망 있는 투자사로부터 투자를 받은 dapp프로젝트나 ICO(Initial Coin Offering, 초기 코인 공개)에 성공한 프로젝트들은 컨퍼런스에 스피커로 초대를 자주 받았다.

우리 회사에도 그런 기회가 오면 '에반젤리스트'인 직 한 명과 내가 함께 출장을 다녔다.

업계의 인물이라고 해봤자 뻔한 사람들을 온갖 곳에서 만나다 보니 괜히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연스레 나도 한국은 물론이요, 미국, 영국, 베트남, 일본 등 크립토 커뮤니티가 활발한 곳이라면 꾸역꾸역 다녔다.

컨퍼런스에 초대를 받게 되면 겸사겸사 현지에서 만날만한 사람이나 이벤트를 엮어서 일부러라도 출장 건수를 만들었다.


제일 난감한 곳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스탠스가 암호화폐에 대해 지금처럼 확고하게 "불법"은 아니었지만, 일반인들이 투자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VPN을 사용해서 중국인들도 크립토 투자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을지오니 크립토 업계의 컨텐츠가 어떤 언어로 발행되는지만 봐도 메이저 국가가 어딘지 알 수 있는데, 우리 회사는 블로그와 텔레그램 커뮤니티 모두 영어,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도 운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중국 시장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 하는(=크립토 투자 금액이 큰) 시장이지만, 너무 특이한 시장이라서 허들이 높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중국 전용 바이럴 마케팅(커뮤니티 마케팅) 에이전시를 활용할 생각에 견적도 받고,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 채용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A라는 기본 마케팅 캠페인 단순히 번역하거나, 약간의 현지화를 다른 마켓에서는 얼추 A'나 a 같은 식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중국은 아예 다른 Q 마케팅 캠페인이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만큼 통용되는게 거의 없었다.


18년 3월, 항저우에서 Global Blockchain Summit Forum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출장을 준비했다.

사실 5월에 ICO가 있어서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어서 출장 준비라고 해봤자 컨퍼런스 장과 멀지 않은 곳의 호텔과 비행기 예약만 완료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엄마에게 들어왔던 말인 '돈이 있으면 일단 어떻게든 해결은 할 수 있다'라는 신조하에 비상시 사용할 수 있도록 US달러만 현금으로 조금 챙겼다.

중국계 싱가포르인이었던 동료 직원이 중국에서는 VISA나 마스터카드로는 결제가 안 될 수도 있다고 조언해줘서, 평소에 쓰지 않던 Unionpay(중국 은련카드) 카드도 챙겼다.


컨퍼런스는 26일 월요일 하루 동안 열렸다.

보통 컨퍼런스 전후로 프라이빗 미팅과 네트워킹이 열리기 때문에, 나는 24일 도착해서 27일 상해로 넘어가는 일정을 짰다. 중국에 가는 김에, 상해의 위워크 커뮤니티에서 발표를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을 만드는 스타일.)


싱가포르에서 5시간 동안 비행을 해서 항저우 공항에 도착한 날은 토요일이었다.

호텔까지 공항 택시를 타고 이동한 뒤에 짐을 대충 풀었다.

오면서 보니 숙소 부근이 다 공사 중이었다.

그래도 의외로 녹음이 많고, 첸탄강이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어서 좀 걷고 싶었다.

조금 구경을 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한 식당에 들어갔다. 주문 전에 혹시 몰라서 확인해보니 내 카드로는 결제를 못한다고 했다.

영세사업자라서 그런지 위챗 페이만 취급하는 곳이었다.

ATM에서 현금을 출금하려고 ATM 기기를 찾았지만 내가 가진 모든 카드로 현금 인출에 실패했다.

이런 경우 최후의 옵션으로 환전소에서 미국 달러(달러 만세!)를 현지화로 환전하면 되기 때문에 근처에 환전소를 찾아봤지만 지도에서 검색이 되지 않았다.

별 수 없이 털레털레 가까운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어는 중국 그 어느 곳에서도 잘 통하지 않았다. 창구 직원에게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중국어로 떠듬떠듬 환전을 원한다(我要换钱)는 초 간단한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매번 안된다고 했다.

나를 거의 없는 사람 혹은 바보 취급하는 은행만 3곳째였다.

하지만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은행별로 외국인 거래에 대한 처리 방침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미국에서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4번째 은행으로 갔다.


다행히 交通银行(교통은행)에서 영어를 조금 하는 직원을 만났다.

그리고 나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주었다.

중국은 외화 유입 및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에, 중국 내에 계좌가 없는 사람, 즉 외국인이면 환전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ATM에서 현금 출금이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차피 카드 출금은 자국 은행과 연결된 계좌에서 잔액이 빠져나가는 건데 왜 안된다는 것일까...

싱가포르에서 미리 환전해올걸...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땅덩어리는 또 왜 이렇게 넓은지 호텔 근처의 은행 네 곳을 모두 걸어 다니느라 나는 꽤나 유산소 운동을 한 상태였고 너무 배가 고팠다. 정신적으로도 지쳐있었다.

좀 큰 쇼핑몰에서는 카드 사용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근처에 있던 MIXC라는 쇼핑몰에 갔다.

The MIXC Mall, Hangzhou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쇼핑몰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모던한 쇼핑몰 내에 입점한 그 어느 식당, 음료 가게에서도 내 카드를 받아주지 않았다.

위안화도 없어, 카드도 못써, 나는 졸지에 빈털터리의 밥도 못 먹은 불쌍한 외국인이 되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텤마머니 를 외쳐도 이해해줄 사람 아무도 없고, 배는 고프고, 영어는 안 통하고...

총체적 난국에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한 패스트푸드 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적어놓은 키오스크에 영어가 조금 섞여있다는 이유로.


나는 카운터로 가서 알바생에게 혹시 이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느냐고 영어로 물었다. 직원들은 당황하더니 웅성웅성하다가, 영어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는 한 여자 알바생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결제가 안된다고 대답했다. 

나 외국인인데 카드결제도 안되고 돈도 없어서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며 달러는 있는데 혹시 방법이 없겠느냐하고 물었다.

내 표정이 너무 참담해서였는지 앳되 보이는 알바생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나를 일단 테이블에 앉혔다.


한참을 직원들끼리 이야기한 것 같다. 그 친구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C로 시작하는 이니셜을 가진 그 친구는 자기가 영어를 제일 잘해서 대표로 왔고, 내가 결제를 못하는 상황이니 자기가 대신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

지금 생각하면 내가 10대? 혹은 20대 초반? 의 소중한 월급 중의 일부를 취득한 거라 손사래를 쳤겠지만 당시에는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너무 고맙다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위안화는 없지만 달러는 있으니 이거라도 받아달라며 20달러짜리 지폐를 쥐어주니까 C는 그렇게 큰돈(?)은 못 받는다며 됐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싱가포르로 돌아가서 음식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송금을 해주겠다고 하고 제일 싼 "샐러드"를 골랐다.

C는 자기가 주문을 하고 결제를 한 뒤 내게 샐러드를 가져다줬다.

말 그대로 눈물 나는 맛이었다.


허겁지겁 허기를 채우고 나서 C의 위챗 계정을 내 위챗의 친구로 추가했다.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로 지금 당장 결제할 방법이 없어서 돈을 빌린 거라고 다시 한번 말하면서, 돌아가서 꼭 돈을 갚겠다고 했다.

C는 정말 해맑게 웃으면서 한국 사람이랑 처음 이야기해봤다면서, 아니 외국인이랑 이야기해본 것이 처음이라고 정정했다.


그 이후 호텔에서는 예약했던 카드로 자동 청구를 하면 된다길래 호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항저우에서는 여전히 빈곤했지만, 상해로 넘어가서 동료들을 만나서는 동료들이 다 계산을 해줘서 더 이상 배고플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상해의 가게들에서는 내 카드로 결제가 잘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아직도 C에게 빚을 갚지 못했다.

내 위챗 계정은 외국인 위챗 계정이고, C는 중국 본토의 위챗 계정이라 계정끼리의 송금이 막혀있었다.

분명 같은 위챗 앱을 사용하고 있는데 기능상 지원이 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위챗 메시지로 양해의 말과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C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C는 괜찮다며, 별일 아니라고 했다.

나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송금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고, C를 친구 리스트에서 유지했다.

그렇지만 한국에 와서는 싱가포르 번호로 연동된 위챗 계정을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어 현재 나는 C풀 네임도, 연락처도 기억하지 못한다.


최악의 출장이었고 그 와중에 너무 고마운 인연을 만나 하나의 해프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사건 때문에 나는 중국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겨버려서 한 동안 중국 시장을 멀리했다.

그 이후, 18년 하반기부터 중국 정부의 규제가 심해지면서 중국 이벤트는 점차 프라이빗하게 열리는 것으로 트렌드가 바뀌었다.

더 이상 공개적으로 컨퍼런스는 열리지 않았고, 주최사가 호텔의 베뉴를 잡고 소수의 사람들만 초대해서 알음알음 간다든가, 조금 큰 규모의 미팅으로 대신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깡그리 금지가 되면서 아예 문이 닫혀버리게 되었지만.


내가 나중에 성공을 한다면 중국 항저우 주민을 대상으로 18년도에 불쌍한 한국인 여자를 도와준 사람을 찾는다는 거대한 디스플레이 광고를 집행할 거다.

C가 항저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온라인 광고도 해야 하나. 아무튼 너무 절박했을 때 나를 흔쾌히 도와주었던 C를 꼭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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