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워싱턴 DC에서
지도를 보면서 걸어가기가 귀찮아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휴대폰 화면에 고개를 처박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고 싶은 풍경이었다.
워싱턴 DC는 대각선 모양으로 길이 나 있어서, 대충 동남쪽 Capitol hill(국회의사당)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기숙사가 나올터였다.
그렇게 한참을 고층 아파트라곤 전혀 없는 주택가를 걸었다.
독일 문화원에서의 행사가 끝난 뒤라 피곤한 상태였지만, 집집마다 뚜렷한 개성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2,3층 짜리 집의 외관과 울타리 너머 보이는 정원을 구경하다가 하얀색의 고풍스러운 벽돌집 앞에 멈추었다.
테라피를 제공한다며 <OPEN>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빗한 개인 집이 아닌 퍼블릭에게 공개된 집인가? 싶어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낮은 단층이 있어 계단을 오른 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하얀색, 갈색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실내가 보였다.
곳곳에 디스플레이가 걸려있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고, 책이 매우 많았다.
빈티지한 가구와 실내 장식 덕분에 흡사 박물관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천천히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비치되어 있는 헤드폰을 쓰고 한참을 집중해서 들어봤지만 내용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 영어 실력이 아직 부족하구나 싶어 조금 우울해졌다.
그러다가 안쪽에 서재처럼 보이는 방에 앉아있는 나이 든 아저씨를 발견했다.
Hi 라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아저씨는 잘 왔다는 식으로 반기며 친절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우주에 관심이 많고, 영어를 잘하고 싶고, 무교라는 것을 말했다.
동양인 여자애가 떠듬떠듬 내놓는 대답이 시원찮았겠지만 아저씨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워싱턴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트레스가 심할 때여서 무료로 제공하는 테라피가 뭔지 궁금했다고 하니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테스트가 있고 책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기숙사까지 도착해서야 깨달았다.
그곳이 사이언톨로지와 관련된 곳이라는 것을.
그땐 사진을 찍지는 않아서 인터넷 검색으로 가져온 사진인데, 대충 이런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자세히 보니 저 가운데 로고가 십자가와 닮아있었네. 그 당시는 그냥 나침반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이 미국 영화에 종종 나오는 '약물 중독자를 위한 모임'이 열리는 봉사단체나 커뮤니티 센터 같은 곳인 줄 알았다.
명백하게 예배를 보는 교회 건물이었다면 내가 당연히 눈치를 챘겠지만, 주택처럼 꾸며진 공간이어서 '종교'와 관련된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야 깨달았다.
내가 들어갔던 곳은 사이언톨로지 창시자 론 허버드를 기리는 '박물관'이었다.
외관으로 봐서는 전혀 눈치챌 수가 없어서 한국에서 온 인턴 나부랭이였던 나는 뭣도 모르고 들어가 봤던 것 같다.
사이언톨로지 창시자 L. Ron Hubbard는 원래 SF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우주 관련된 영상이 많았구나!
SF덕후인 내가 몰입해서 구경했을만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톰 크루즈가 열혈 신도라고 알려진 그 종교, 사이언톨로지!
과학 기술을 통한 정신 치료를 신봉하는 종교인데(사실상 미국 할리우드에서만 종교 취급받음), 나의 영어 실력 때문에 아저씨의 포교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귀가 얇은 나는 심취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중에야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테라피를 홍보하면서 포교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소름이 돋았다.
편견 없는 사람 시리즈를 연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둔한 사람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