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130 황금빛 모서리
시집의 첫번째 시다. 백수 시절에 이 시를 늘 읽었다. 모두 퇴사를 말렸는데, 홧김에 퇴사를 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단 좌절이 삶을 짓누를 때 저 시만이 나를 위로해줬다. 이탈과 자유. 이질적인 두 단어가 나를 위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가끔, 문득 이 시를 읽으며 그 시절의 나로 잠시 돌아간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한번 더 명심하면서. 그래서 가끔 누군가 길을 헤매고 있는 이가 있으면 이 시집을 선물하곤 했다. 자유를 응원하며. 이 시를 찾는다는 건 그만큼 나 역시도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말이겠지.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말고, 이번에는 조금 더 현명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