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되지 않는 봄

이병률, 몇 번째 봄

by 김조안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겨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도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203 바다는 잘 있습니다


봄은 취소되지 않는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문장이었다. 봄은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것이 아니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도 기분이 좋고, 문득 비워둔 자리에 누군가 앉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청신한 비누향이 나는 셔츠에 잠시 몸을 기대고 싶은 계절. 이토록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한 글자가 또 있을까. 취소되지 않는 봄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영영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