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길게 미워지는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곰>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읽었다. 요즘 내 맘과 같은 제목이 끌렸다.
그림책 속의 곰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친구가 하자고 하면 잘도 함께 한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걸까?
옆에 저런 친구가 지금 있다면 조금 더 빨리 감정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로자 파크스-
몇 주 극심한 우울 기다. 그냥 남편이 밉고 같이 있는 시간이 힘들었다.
어떤 말을 해도 이기적으로 보이고 소통하고 싶은 맘조차도 안 들었다.
감정에 휘둘려 이유를 모르겠는 며칠이 답답했다.
수영장을 가는 중에 신호에 걸렸다. 문득 머릿속을 무언가 스친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친정아빠의 병세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집안이 뒤숭숭했다. 아빠는 10년째 파킨슨을 앓고 있는데 선망이 심해지고 그로 인해 엄마를 의심하기까지 하는 증상이 나타나면 약조정이 필요하다.
환자인 아빠와 환자를 돌보는 엄마 사이에는 감정이 쌓이게 된다. 할머니에 이어 아빠까지 15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의 고단함이 느껴지기에 짐작도 안 되는 깊은 감정에 바쳐 뱉어내는 말도 이해를 해본다.
다행히 약조절이 잘 되어 열흘 만에 다시 온순한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엄마도 한시름 놓았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런 시기를 지켜보다 보니 이번엔 나조차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우울감이 오래간듯하다. 나에게도 저런 병이 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커졌다.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서 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가족 모두를 나도 모르는 내 모습 때문에 힘들게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맘이 무거웠다. 모든 게 귀찮고 무기력해졌다.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감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에게 자꾸 화가 나는 거지? 뭐가 서운한 거지?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내 두려움과 불안감에 남편의 공감과 위로가 부족했음을..
그냥 아무나 해줄 수 있는 말뿐이었음을..
남편은 오래전에도 나에게 이런 태도로 상처를 준 적이 있었지.
감정에 너무 솔직해서 나에게는 상처가 되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첫째를 낳고 탯줄을 자르는 순간 얼굴에 나타났던 징그러워하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위에 닿는 탯줄의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였다고 했다.
둘째를 낳기 전에 세 번의 유산을 했는데 모두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받으러 가는 날 남동생이 위로차 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남편은 동생과 웃으며 이야기했다. 뒷자리에서 나는 세상을 다 잃은 기분으로 그의 입을 보면서 슬펐다. 계속 슬픈 모습을 보이기 그래서였다지만 내게는 상처로 남은 일이다.
집안일을 하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남편에게 전화를 했었다.
남편이 달려와 병원으로 갔다. 기다리는 내내 앉기도 서기도 어려운 허리통증으로 인해 힘들었다. 남편은 내 옆에서 위로의 말과 행동대신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했다.
달려와서 병원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그의 역할인 건가.
과거의 서운하고 미운 마음이 올라오며 과연 남편과 여생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 지금보다는 자주 병원 갈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럴 때마다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들면서 급 우울해졌던 모양이다.
감정의 저 아래에 있던 불안감이 올라와 남편과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남편은 여전히 자세하게 설명을 해줘야지만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부분에서 불안감과 우울감이 많이 커졌고 나도 모르게 감정을 지배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아챘다.
걱정하는 일의 92%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걱정이 나를 무기력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같이 있기 싫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안을 조장해 육체적인 병으로 이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알아차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과거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현재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해 즐겁기로 했다.
누구든 완벽한 사람은 없겠지만 무의식의 서운함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과거의 감정으로 미래를 상상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미래는 미래일 뿐이고 오지도 않은 일로 현재를 망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잘 흘려보내줘야지.
그리고 지금의 남편의 모습을 보자. 그리고 나를 보자. 감사한 일들을 떠올리고 기록하자.
그래도 밉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써지는 감사한 것이 적지 않은 걸 보니 내려놓을 수 있는 감정일 것 같다. 노후자금을 두둑이 모아놔야겠다는 것에 생각이 멈춘다. 하고 싶은데로 하려면 부유한 편이 훨씬 유리하기에 돈을 생각하며 미소 지어본다.
웃으며 긴장감을 풀고 웃을 일을 만들어 오늘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부러 내게 상처 주려는 행동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저 공감능력과 대처하는 방법이 나와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별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