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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빠

by 꿈지

핸드폰 문자에 하루에 몇 개씩 상속인 조회결과가 울려댄다. 그 때마다 아빠의 부재를 실감하게 된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벅찰 것 같아 평일에 친정에 며칠 머물며 엄마와 함께 했다. 보험관련건과 사망신고를 위한 절차에 따라 서류를 떼고 하루 종일 여러곳을 오갔으며 두시간에 걸쳐 문서 작성을 했다.

결국 내 손으로 아빠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했다. 말로는 차마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 올라왔다.


24년 10월20일 이른 아침 119를 타고 응급실로 향한다는 구급대원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고열이 나고 의식이 혼미한 상태라고 했다. 그 후로 아빠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2주 동안 폐렴치료에 집중했다.


파킨슨을 지병으로 10년 세월이 흘렀다. 9월 어느 날 혼자 엄마에게 드린다며 음료와 과일을 챙겨 나선 아빠는 다리의 힘이 풀리며 넘어져 얼굴이 크게 다쳤었다. 그 후로 외출이 두려워져 거실에서만 움직이는 정도였고 마당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지나지않아 부쩍 근력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뵐 때마다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와드리지만 넘어짐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은 어려웠다.

약 복용 후 바로 잠을 자는 생활을 한지도 일 년이 넘었다. 약의 성분을 낮추면 잠자는 시간은 줄일 수있지만 파킨슨병 증상에 배우자의심 증상이 있는데 아빠는 환영과 환청으로 엄마를 너무 힘들게 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생활을 하는 아빠가 안쓰럽지만 복용 중에도 혼자 어디를 다녀오기도 하고, 엄마를 많이 힘들게도 했던 상황이라 주무시는 동안 엄마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존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빠를 봐도 엄마를 봐도 안쓰럽고 맘이 아팠다.

할머니도 파킨슨병으로 마지막에는 엄마가 모셨고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 과정을 다 경험한 엄마는 아빠의 진행상황을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감히 얼마나 힘들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가끔가는 우리가 매일 함께하는 엄마의 힘듦을 감히 어떻게 말할수 있겠는가.

중환자실에 면회는 일주일에 한번이었고 환자의 존엄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빠의 모습에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콧줄로 간신히 연명되고 있는 생명과 그 생명줄을 무의식적으로 뽑지 않게 하기 위해 묶여있는 손. 그리고 앙상하게 말라있는 몸. 와상상태로 꼬리뼈 주위에 몇 주 사이에 깊어지고 있는 괴사. 산소 호흡기까지 하고 있어 겨우 자식이나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눈만 뜨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 이미 폐한 쪽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폐암소견이 있다고 했으며 더 이상 유지 외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의사의 소견.

엄마는 중요하고 힘든 결정을 내렸다.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었다.

넘어지면서 뼈에 금이 가 팔에 반깁스를 한 엄마가 와상상태의 아빠를 돌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집 가까운 의료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매일 면회가 되었고 간병인이 아빠를 돌봤다. 중환자실에서 퇴원하면 곧 돌아가실 것 같던 아빠는 몰라보게 회복되었고 우리를 다 알아보고 대화도 가능했다. 호스피스병실까지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아빠가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다 판단했다. 의료원에 있으니 엄마가 매일 아빠를 볼 수 있어 좋았지만 1대1 간병비가 부담이 되었고 일반 환자와 병실을 같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려움이 생겼다.

콧줄로 음식을 섭취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아빠는 식사시간이 되면 괴로웠고 퇴원하는 환자를 보는 우리는 상대적인 우울함이 더했다. 아빠는 이제 집으로는 갈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집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전을 대비하고 통합간병이 가능하고 비슷한 분들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모든 결정에는 엄마의 의견이 가장 컸지만 이번에는 자식들의 의견에 엄마가 따라줬다.


11월8일 아빠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면회가 되었고 엄마가 버스로 가장 접근하기 좋은 조건에 있는 병원이었다. 시설도 괜찮았고 평이 좋았다. 무엇보다 큰 이모가 이곳에서 일 년 지내고 돌아가신 곳이어서 믿음이 갔던 병원이었다.

요양병원에서도 아빠는 집중케어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옆 병상을 보니 아빠와 비슷한 모습을 한 노인들이 누워있었다. 이곳에서는 아빠를 돌봐줄 사람들이 많고 엄마도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같아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그렇다고 했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지 아빠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적응하는 듯 보였다. 아니면 체념이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가 폐렴 좋아지면 집으로 가자고 말했더니 ‘이제 당신 좀 편안해지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우린 또 눈물바다가 되었다. 울다 웃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시간이었다.

용인에서 전주까지 매주 내려가서 아빠를 보고 엄마를 보는 시간이었다. 멀다고 자주 못 갔던게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시간 날때마다 일있을때마다 내려갔다.

그렇게 장기전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팀씩 돌아가며 다섯형제가 내려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한주를 쉬었고 토요일부터 아빠는 다시 고열이 나기 시작했고 잡히지 않아 힘든 며칠을 보냈다. 화요일에는 열은 조금 잡혔다고 했다. 안심하며 한주 당겨서 주말에 내려가려고 맘 먹고 있었다.

화요일 밤 갑작스런 비상 계엄령으로 심란한 맘으로 잠을 잤고, 수요일 아침에 수영장에 가려고 준비중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느낌이 싸했다.

“누나, 아빠가 위독하다고 연락이 왔어. 보호자들 얼른 병원으로 오라고. 일단 가까운 매형이 병원으로 갔고 상황보고 연락준다고 했어”

“어? 알았어!”

남편에게 바로 전화를 했고 한걸음에 달려와줬다.

맘이 집중이 안 되서 짐이 싸지지가 않았는데 다시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산소포화도랑 혈압이 좀 좋아졌다고 연락이 왔어.”

잠깐 갈등이 생겼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 상황이고 조금 지켜보다 내려갈까? 아니지 밤에 다시 올라오더라도 바로 출발하자. 남편은 모든것에서 내 의견을 존중해줬고 큰딸로서 최선을 다하라고 다독여줬다.

3시간을 달려 10분 남겨 둔 상황에 먼저 도착한 막내 남동생이 빨리오라며 전화했다. 남편은 비상깜빡이를 켜고 달렸고 도착해보니 아빠는 2주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겨우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픈 숨을 내쉬고 있었고 우리 목소리를 듣고 가늘게 뜨는 눈은 초점이 없었다. 가래를 빼려고 잠깐의 호흡기를 내려놓는 사이 산소포화도가 30까지 떨어졌고 혈압이 곤두박질쳤으며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우리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엄마, 큰딸, 막내아들, 마지막으로 급하게 도착한 큰아들이 아빠의 모습을 보고 많이 울었고 많이 말했다. 사랑한다고.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하다고. 엄마걱정은 하지마시고 편히 잠드시라고. 우리는 모두 다 잘 살고 있으니 걱정마시라고. 다음생에는 꼭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태어나라고. 아빠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드시고 싶은 것 맘껏 하는 삶으로 태어나시라고.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또 누군가는 죄송하다고 속으로 속으로 속죄를 했다고 한다.

나는 아빠의 손을 꼭 쥔 채 임종을 지켰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24년 12월 4일 오후 5시. 내가 도착하고 1시간 30분 뒤였다.

수영장에 들어가 연락을 못 받았거나, 조금만 망설였어도 마지막을 함께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장기전을 준비했는데 요양병원으로 옮긴지 한 달도 안 되어 아빠는 고인이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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