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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Oct 07.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3화. 그래서 나는 김해인과 결혼했다. episode2



졸업과 함께 나는 야심 차게 런던으로 떠났다.

런던 생활은 마치 새로운 영혼의 심장을 이식받아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 순간이 짜릿하게 새로웠다. 

유럽의 유명한 영화제들을 돌아다니던 순간들,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과 모여 살았던 노팅힐의 작은 아파트,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난 후에는 솔직히 나 자신이 너무 멋져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공원을 우다다다 달리기도 했다.

여전히 현실에는 한 발쯤만 발을 내딛고 약간 공중 부양을 한 것 같은 기분으로 살던 꿈같은 나날이었다.

나는 늘 일하고 싶었던 NFT(National Film Theater )에 여러 번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백수로 2년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NFT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인 것 같았지만 20년 후, 내 인생의 작지만 중요한 사건으로 다시 한번 등장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영화 현장으로 나가지 않고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 조연출이 되었다. 그리고 첫 월급을 타던 날 엄마와 점심을 먹고 혼자 종로 씨네코아에서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았다.

영화가 끝이 나고 남자 주인공의 잘 생김에 혼자 가슴 설레어하며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은혜야, 불렀다.

돌아보니 그 자리에 김해인 씨가 서 있었다.

안경을 벗으며 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보고 웃는데 

‘저 녀석이 저런 지적인 느낌이었나? 츄리닝 말고 다른 옷도 있었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멋져 보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치 '군대 제대하면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이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다.

(아. 임신해서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결혼 2년 후 태어났어요. 많이들 물어보셔서..)

씨네코아에서 다시 만나 결혼을 한 우리는 매해 그날을 기념하며 씨네코아에 가자고 약속을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


결혼 준비 내내 복학생 김해인 씨는 졸업영화 촬영으로 매우 바빴다.

당시에는 졸업영화제에 독립영화 배급사와 제작자들이 참여를 해서 작품과 학생들을 눈여겨보곤 했다.

가끔은 눈에 띄는 작품들은 단편이 바로 장편으로 디벨롭되어 만들어지기도 했고 , 독립영화의 스타 감독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해인 씨가 졸업영화를 찍던 그 해는 영화 산업과 학생 영화에 무척이나 큰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바로 영화들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중요한 시점이었던 것.

필름 회사들은 필름 생산을 중단했고 교수들은 졸업영화를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찍기를 은근하게 강요를 했다. 필름에 비해 제작비가 저렴해서 경제적이고, 장비도 가볍고 간편해져서 적은 인원으로도 촬영이 가능하다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인생 한 번뿐인 졸업 영화는 무조건 필름으로 찍고 싶었던 촬영 전공 김해인 씨는 교수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하고 투쟁을 하고 싸움을 하고 결국, 우리 학교의 마지막 필름 영화를 찍으며 졸업을 했다.

16mm 필름통을 담배 재떨이로 사용하고, 필름을 자르고 이어 붙여 편집을 하던, 다소 불편했지만 낭만이 넘치던 시대.

필름 영화의 시대는 우리학번의 졸업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리고 김해인 씨의 졸업과 함께 우리는 결혼을 했다.

솔직히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던 부모님 덕에 봉천고개 위에 자가의 작은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 집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이 없던 우리에게 뒤로 두 번은 물러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임신과 육아로 나는 재능 없이 열정만 있던 방송 조연출 생활을 청산했고 , 학교에서는 모두 우러러보던 멋진 선배였던 김해인 씨는 졸업 후  열정페이 삼십만 원을 받는 촬영부 막내가 되었다.

지금은 생소한 말이 된 열정페이는 이십 년 전, 영화를 한다면 너무나 당연했다.

결혼 후 처음 받은 돈이라며 땀에 젖어 축축해진 만 원짜리 서른 장을 내 손에 안겨주던 날, 나는 드디어 공중부양을 하며 둥둥 떠다니던 꿈에서 내려와 현실에 발을 붙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버텨야 하는 거야, 이런 인식들이 청년에게 당연히 요구되던 잔인한 시대를 온몸으로 버티고 싸워 이제는 자신의 이름이 앞 장에 찍힌 대본을 받는 촬영감독이 된 김해인 씨.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십 년 넘게 하면 자연스럽게 베테랑이 되어간다.

촬영 이십오 년 차 김해인 씨는 베테랑 촬영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 이십 년 차. 오늘도 나는 프리랜서 촬영인 김해인 씨의 베테랑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

정말 모든 순간이 쉽지 않았던 영화인 김해인의 아내로 살아가며 마흔 중반이 되니 더 이상 꾸밀 것도 없고 직진으로 솔직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영화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쉽지 않았던 시간에 대하여 말이다.


스무 살 영화 현장에 뛰어들어 서른여덟, 촬영감독으로 데뷔. 그리고 마흔다섯이 된 지금

30만 원 열정 페이를 당연하게 견디던 시대를 지나, 촬영감독이 된 지금까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이 없는 프리랜서 김해인 씨가 견뎠을 막막함을 생각해 본다.

그 옆에서 나는 김해인 씨의 아내로 살며, 가끔은 땅 아래로 꺼질 것 같은 이 사람의 무력감과 우울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고, 때로는 꿈을 이룬 사람의 당당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 한결같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나는 김해인 씨의 첫 번째 팬이며 첫 번째관객이라는 마음이었다.


김해인 씨는  그동안 어린 날의 꿈이나 예술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며 카메라를 잡는 날이 더 많았고, 가끔은 실패를 하고 수 없이 많은 좌절을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업적이 쌓였고 나는 김해인 씨의 그 모든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촬영장에서는 어쩐지 멋지지만, 일상에서는 양말 좀 빨래통에 잘 넣으라는 내 잔소리를 들으며 핸드폰 오락에 열중하는 생활 밀착형 촬영감독 김해인 씨.

김해인 씨도 자신의 모든 순간을 마구 자랑스럽게 여겨주기를 바라며, 살아온 삶의 절반을 영화인의 아내로 살아간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내 인생에 아직 이보다 기쁜 날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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