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궁극의 프리랜서
학교는 가슴속에 꿈과 환상을 가득 안겨준 채 차갑고 냉정한 영화판의 현실로 우리를 내뱉었다.
영화란 나에게 여전히 눈뜨고 꾸는 꿈이지만, 영화인의 아내로 사는 일은 불안과 일상의 불규칙성을 모두 다 내 삶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이었다.
방송 조연출을 하며 내가 번 돈의 80%는 꼬박꼬박 적금을 넣고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준 옷을 입고, 아빠가 사준 스포티지를 타고 다니던 그 시절에는 몰랐다.
두 발을 땅에 딱 붙이고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면서도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어릴 적 꿈은 프리랜서였다.
프리랜서가 뭔지도 모르면서 멋있어 보였다.
프리랜서.
멋진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 한 손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복잡한 도시를 바쁘게 또각또각 달려가는 크리에이티브한 예술가. 회사에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아닌 프리랜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멋진 20대와 30대의 모습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 , 그것은 내가 늘 생각하는 궁극의 프리랜서였다.
프리랜서는 자유의 프리 free와 전쟁에 사용하는 긴 창을 뜻하는 랜스 lance의 합성어이다.
창의 개수로 전술 규모를 파악하던 중세 시대, 왕이나 영주에게 속하지 않고 고용주의 보수를 받고 전쟁에 참여하던 용병을 프리랜서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제든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돈을 받고 싸우는 프리랜서들은 상황에 대한 파악과 적응 없이 어디든 뛰어들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은 승패와 상관없이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지면 죽는 것.
철없던 시절의 프리랜서 환상은 결혼과 함께 깨어지고 프리랜서라는 것이 매일매일이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오늘은 촬영장을 멋지게 돌아다니지만 내일이면 바로 잘릴 수도 있고, 다음 작품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이 들어갈 때마다 ,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팀이 되어 새로운 장소에서 일을 해내야 했다. 매번 새로 계약서를 쓰고 촬영이 끝나면 해촉 증명서를 썼다.
촬영인과 백수 사이를 늘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 그 줄 위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 불안감을 늘 안고 자신의 존재를 매 순간 증명해 내야 하는 김해인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전쟁 같았을까, 생각을 한다. 가족의 생계를 등에 업은 김해인 씨는 늘 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긴 창을 휘둘러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을 사는 내내 절대 내색하지 않고 나의 생활을 해내야겠다, 마음속으로 주먹을 꼭 쥐던 비장 하지만 귀엽던 이십 대의 내가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대견하다.
십 대, 이십 대에 멋지다고 생각했던 프리랜서의 이미지는 몽땅 잘못된 주입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날은 하늘에다가 소리 지르고 싶어졌다.
프리랜서! 하나도 멋지지 않잖아!!!!!
2013년. 날씨 좋은 봄날,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의 촬영부가 된 김해인 씨는 촬영장에서 바로 잘린 일이 있었다.
촬영 중, 현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오지 마! 그 자리에서 해고를 통보받아도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던 억울한 촬영부 김해인 씨는 새벽에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 집으로 돌아왔다.
늘 염두에 두고 살던 일이지만 막상 연락을 받고 나니 어떤 얼굴로 김해인 씨를 맞이할까, 고민을 하며 버스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터덜터덜 걸어오는 김해인 씨가 어찌나 측은하던지 고민을 했던 나 자신이 머쓱해져서는 우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손을 잡고 둘이 걸었다.
잘 때려치웠어.
사실 나도 그 감독 진짜 맘에 안 들었거든.
둘이 밥을 먹으며 감독과 방송국 소속의 촬영감독을 잘근잘근 씹었다.
프리랜서 생활에서 제일 최악은 건강 보험료와 국민연금, 그리고 각종 세금의 처리이다.
일반 직장 근로자의 곱절은 내야 하는 보험료, 5월이면 내야 하는 종합소득세, 지방세…. 나처럼 허술한 사람은 제 때 세금도 못 낼 지경이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일보다 로케이션 장소에서 숙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흔한 일이다. 한 달쯤은 양호한 편이고 해외촬영을 나가면 3개월씩 집에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촬영 기간 중 식사 해결은 어떻게 하는가!
모든 것이 경비 처리인 직장인의 출장과는 달리, 영화나 드라마는 계약서에 따라 식비가 달리 처리된다.
식비 포함인가, 아닌가, 자차를 이용한다면 유류세는 얼마나 지원될 것인가.
모든 것이 업계의 관행에 더해 개개인의 협상 능력에 달라진다.
지금은 촬영감독이 되어 식비나 유류세는 당연히 법카를 사용하여 처리되지만 촬영부이던 시절에는 식비 불포함의 계약을 하게 되면 속으로 욕을 했다.
쳇. 밥도 안 먹여주는 현장 따위!
하지만 계약이 맘에 안 들고 감독이 사이코 같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너무나 숭고함으로.
그리고 프리랜서의 세금만큼 중요한 것은 소득관리, 정확히는 저축관리이다.
어떤 달의 소득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만큼 크기도 하지만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그 달의 소득은 0원이 된다.
소득은 이렇게 오르락 내리락이지만 보험료나 연금들은 한 번 책정되면 1년을 당위로 책정되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
이론상으로는 석 달은 아무 일없이 버틸 수 있을 만큼 고정 지출 비용이 저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내일 당장 촬영장에서 잘리고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쿠팡 배송으로 뛰어들지 않고, 직업인으로서 다음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내가 하는 일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나갈 수 있다.
사실 궁극의 프리랜서란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가 아닌, 얼마나 돈 관리를 잘 해내어 내 일을 지켜내는 것인가과 관건인 그런 사람인 것이다.
지난 주말, 친구의 친구결혼식에서 축무를 추었다.
나는 4년째 하와이안 전통춤인 훌라를 배우고 있는데, 나의 특별한 훌라 시스터의 오랜 친구 결혼식이었다.
타인의 새로운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만 축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축무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결혼 20년, 우주의 별처럼 많은 일을 김해인 씨와 함께 겪으며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았다.
몸이 부르르 떨리게 너무 좋아!! 는 아니지만 이 삶이 제법 행복하네, 생각하며 살고 있기에 두 사람의 새로운 앞 날에 행복한 축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 축무를 준비하는 일이 내겐 무척 특별한 일이었다.
축무의 곡인 Can't help fallining in love을 백번 넘게 들으며 가사를 한 줄 한 줄 곱씹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것이 이토록 무거운 의미라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사는 게 늘 무거울 필요가 있을까, 다음 생에도 둘이 만난다면 우리 둘이 결혼을 하고 손을 잡고 그 삶을 살겠지.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가볍기도 했다.
신랑 신부 앞에서 내 안의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꺼내어 축복의 춤을 추며, 나도 오래되어 잊고 살던 김해인 씨와 나의 행복들을 소중히 꺼내보았다.
손을 잡고 살아온 날들이 감사했고 손을 잡고 살아갈 날들이 기대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