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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Oct 22.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5화. 뜨고 싶다면 나에게로




몇 년 전, 쇼핑몰에 들어서는데, 쇼핑몰입구에 유명 의류브랜드 광고모델로 배우 유연석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나는 유연석 배우는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사진을 보며 마음이 마구 웅장해져 왔다.

자신의 길을 의심이 없이 묵묵하게 걷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갈 수 있다라는 확신의 믿음, 뭐 그런 종류의 감정들에 가슴이 꽉 차오른 것이었다.


김해인 씨와 배우 유연석이 만난 것은 둘 다 너무나 쪼뮤래기던 그런 시절, 독립영화 촬영장에서였다.

김해인 씨는 지금은 촬영감독이지만 처음부터 촬영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않았다.

무척 유명한 조명팀의 막내로 영화를 처음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한동안은 쉽게 촬영부로 옮기지 못하고 꽤나 오랜 시간 조명부로 일을 했다.

조명부로 말하자면,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와서 조명을 설치하고 촬영이 다 끝난 후에도 가장 늦게 촬영장을 떠나야 하는, 체력적으로 가장 힘든 조직이다..

게다가 장비들도 그렇다. 셀 수 없이 많은 전선들, 전구들, 스탠드, 챙기기도 곤란한 것들로 늘 가득해서 어쩐지 정리벽이라도 있어야 조명부의 일을 빈 틈 없이 수행해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조명장비는 일반 스타렉스가 아닌 거대한 탑차에 실어서 다녀야 하니 승차감도 꽝, 속도도 꽝, 이동시간도 늘 길고 피로에 쩔어있는 참 고단한 팀이 조명부인 것이다.

나는 김해인 씨가 조명부일 때는 늘 잠을 설쳤다.

바람이 불어도 걱정, 비가 오면 더 걱정, 밤늦도록 촬영하면 탑차 운전하다가 졸릴까 봐 더더더 걱정. 눈이 오면 탑차가 미끄러지는 건 아닐까, 특별히 더 걱정이 많았다.

사실 나는 정말 걱정이 많고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 돌다리를 백번 두드려보고 겨우 건널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라서, 그런 내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직업의 김해인 씨와 사는 일은 사실 남 모르게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밤 샘 촬영이 있는 날에는 김해인 씨가 무사히 집에 돌아와야 잠에 들었고, 숙박을 하면서 촬영을 할 때에도 무사히 숙소에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아야 하루가 안전하게 마무리되었구나, 안심을 하곤 했다.

나 같이 소심한 불안쟁이와 사느라 대범한 김해인 씨 또한 마음이 많이 피곤했겠구나,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사람이 나이가 든 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는 참 좋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져서 어쩐지 느긋해지는 기분이랄까.


2010년 겨울은 특별히 더 추웠다.

실제 기온도 평년보다 추웠지만 , 마음도 특별히 춥고 , 일도 ,솔직히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던 겨울이었다.

아직은 조명부였던 김해인 씨는 독립영화 혜화, 동을 그 겨울에 찍었다.

김해인 씨 인생 최초의 독립 영화였던 혜화, 동

상업영화 중에서도 주로 예산이 큰 영화 현장에서 늘 일을 하던 김해인 씨의 첫 번째 독립영화의 인상은 역시 돈의 문제였다.

예산이 적다! 적은 예산만큼 몸은 더 많이 머리도 더 많이 써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그 안의 사람 간의 관계는 더 쫀쫀해져 갔다.


그 해 겨울은 눈이 어찌나 자주 많이 오던지, 어떤 하루는 촬영장으로 새벽 7시에 출발을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조명장비를 실은 탑차가 내부 순환로에 진입을 못하는 일이 생겼다.

눈에 미끄러질까 천천히 천천히 촬영지였던 향동동에 도착을 하니 이미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당시 향동동은 재개발을 위해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되어 어딘가 버려진 도시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폭설로 촬영이 취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천천히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니 2시.

우리 집에서 향동동은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무려 왕복 7시간이 걸리다니.

허탈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적은 예산과 열악한 환경, 혹독한 날씨안에서 한 달 안에 영화 촬영을 마치는 일이 생각보다 더 고되었는지 김해인 씨는 유독 그 촬영을 힘겨워했다.

어느 날은 촬영을 마치고 집에 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아프리카에 가서 농사를 지어도 이보다 쉬울 것 같아.

이제는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여서 그 어려움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힘들면 영화 같은 거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아,라고 몇 번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다행히 김해인 씨는 말만 힘들어 힘들어했지 절대 영화 같은 거, 그만두지 않았다.

다만 , 언제부터인가 늘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잘 때도 , 밥 먹을 때도 쓰지 않는 손은 늘 주먹을 쥐고 있다.

나는 그게 안타까워서 그 사이에 손을 넣어 슬며시 그 손을 잡으며 그 주먹을 펴주곤했다. 

'당장 집 앞 화분에 심은 방울토마토도 다 죽이는데 아프리카에서 농사는 쉬울 것 같고? '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 아프리카에 가자고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가야지, 마음속으로 수 없이 가방을 쌌다.

그 시절 내 마음은 정말 그랬다.



영화는 촬영이 끝나고 일 년 후, 개봉을 했다.

독립영화제등에서 상도 참 많이 받았고 상을 받거나 좋은 소식이 생길 때면 참여한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회식도 하고 간간히 모임을 가지면서 독립영화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다.

영화가 개봉을 하고 나는 혼자 영화를 두 번 보았다.

쪼무래기 조명부는 엔딩 크레딧 거의 끝에서야 이름이 올라갔지만 그 이름이 너무 고마웠다.

힘들어서 어쩔 줄 모르던 일 년 전 겨울의 김해인 씨가 생각나서 영화 보는 내내 코 끝이 찡해져서 엉엉 울었다.



힘든 시간을 묵묵하게 걸어 김해인은 자신의 이름이 앞에 찍힌 대본을 받는 촬영감독이 되었고 유연석은 누구나 아는 대 스타배우가 되었다.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본 그들의 지난날은 참 멋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당시 멋진 날보다 지질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말이다.





작품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지금은 대배우가 된 수많은 배우들의 초기 작에 김해인 씨가 참 많이 참여를 했다.

ㄹ,ㅇ,ㅅ,ㅎ,ㅂ

지금은 너무나 대 배우가 된 분 들 이어서 이름을 거론하기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 신기할 정도로 김해인 씨와 찍고 나서 다음, 혹은 그다음 작품쯤에서 모두 들 빵! 떴다. 근데 왜 뜨고 나서는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지?

그게 좀 아쉽긴 하지만 덕분에 그분들의 푸릇푸릇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많이 나눈 사이가 되었다.

둘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씩 한다.




뜨고 싶다면 나에게로.

다음에 명함을 만들면 그 문구를 넣으라고 해야지!

몇일 전에는 ㄹ배우와 술자리 에피소드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명함이 진짜 나온다면 너무 재미있겠다 생각하며 큭큭 웃었다.



스탠드를 잡고 있는게 가장 중요한 업무이던 어쩐지 귀여운 조명부 막내시절.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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