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밥 세계관과 공명하는 쿠이 료코의 단편 만화들을 소개한다.
지난 5월, 쿠이 료코 작가의 작품 <던전밥> 14권이 한국에 정식 발간되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짜인 세계관을 빈틈없이 유지하는 작가의 구성력에 감탄하며 끝까지 몰입하며 읽었다.
결말을 읽은 기쁨도 잠깐, 좋아하는 만화가의 좋아하는 작품이 끝나자 기다리는 낙이 없어졌다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도무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쿠이 료코 작가의 작품집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던전밥> 완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읽은 작가의 작품집들에서 <던전밥> 세계와 공명하거나 원형이 된 이야기들을 만났다. <던전밥> 세계의 괴물, 다양한 종족, 유머 코드, 그리고 어딘가 서늘하고 쓸쓸한 면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했다면 분명 반가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집 속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을 공유한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
한국에 2016년도에 발간된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마왕과 마왕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 켄타우로스와 인간이 공존하며 생기는 차별과 갈등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제가 담긴 단편집이다.
‘귀향’은 마왕 토벌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용자를 바라보는 한 소시민의 하루를 따라간다. 흔히 용자하면 떠올리는 건장하고 기운찬 남자가 아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용자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전형적인 용자가 아니다. 마왕이 있었기에 오히려 인간들 사이의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끝나고, 곧 시작될 전쟁에 불려 나가게 될 처지의 용자는 무심코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고 만다.
복잡하게 얽힌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와 당당하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이용당하는 것 같은 용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영웅담에 감춰진 그늘을 발견하게 된다.
‘마왕성 문제’에서는 앞선 ‘귀향’에서 다뤘던 주제인 마왕 토벌 이면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왕이 사라진 이후 마왕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처분을 놓고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라는 왕의 요구가 내려온다. 살육만을 목적으로 설계된 마왕성과 그 인근의 척박한 땅을 배경으로 마왕 토벌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인간을 향한 원망을 간직한 전직 용사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무엇인지 전한다.
표제작인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부장의 인사말이 ‘여러분이 취업할 곳은 없습니다.’인 용 연구회의 학생들 이야기다. 모든 것이 쓸모와 비용을 토대로 계산되는 현대 사회에서 오로지 용에 대한 애정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가려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좋아하는 걸 마음껏 좋아하기 이전에 세상의 잣대를 의식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주제를 다룬다.
공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현대 일본에서 용의 활용 방법을 찾아내려는 용 연구회 학생들은 각종 시도를 하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이래서 어렵구나, 라며 끝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결말부에 ‘이용 가치가 없는,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연구하는 일이 왜 의미를 가지는지 두근거리는 메시지를 전한다.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한국에 2016년에 발간된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에는 단편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용과 얽힌 두 분쟁국,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마주친 작은 신, 엄청난 초능력을 가진 가족들 사이에서 사소한 초능력으로 고민하는 소녀,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아들과 사는 어머니가 현대사회에 겪는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인어금렵구’는 인어와 어업 종사자, 인권 단체들이 얽힌 현실적이고 복잡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수풀에 쓰러진 한 인어를 발견한 소년은 인어를 도와주려고 한다. 하지만 소통이 쉽지 않고 서로 속한 세계와 상식의 차이가 오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주인공은 두려움이나 어려움을 느낀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경계선을 탐색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다.
‘무일푼 뱌쿠로쿠’는 한 노년의 화가 이야기를 다룬다. 뱌쿠로쿠는 뛰어난 솜씨로 생물을 그리면 그 생물이 종이에서 뛰쳐나와 살아난다고 하여 한쪽 눈동자만은 절대 그리지 않는 최고의 화가다. 그런 재주를 가졌지만 사기를 당해 돈이 떨어진 뱌쿠로쿠는 한 남자를 그린 위작에 눈동자를 그려 넣어 그를 살아나게 만든다. 뱌쿠로쿠는 위작 속 남자의 도움으로 지금껏 자신이 그린 상서로운 동물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살아나게 만들고, 이를 팔아 회생할 생각이다. 둘은 뱌쿠로쿠가 지금껏 그린 사자나 용 같은 상서로운 동물 그림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무일푼이 된 뱌쿠로쿠는 찾아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서로운 동물들을 매번 놓친다. 마지막으로 절에 그려둔 용을 찾아간 둘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다. 유머로 가득하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이르러서 반전과 함께 감동을 선사한다.
서랍 속 테라리움
한국에 2022년도에 발간된 서랍 속 테라리움은 앞선 두 작품집 속 단편에 비해 길이가 짧은 단편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짧고 강렬한 단편들에 때로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웃긴 아이디어가 담겼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부터 종에 관한 자유분방한 스케치, 책을 읽다가 잠들면 펼쳐지는 재기발랄한 판타지 세상, 학교 종이 인형극 발표 준비에서 시작된 방대하고 어두운 토끼인과 생쥐인 이야기 등 세계관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쇼트쇼트’는 ‘당신도 그렇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메타 픽션적 성격을 띠는 이 단편은 열혈 청춘 스포츠물의 주인공 아버지와 순정 로맨스 만화 주인공 어머니, 오피스물 주인공 언니, 판타지 퇴마물 주인공 오빠를 가족으로 둔 막내 소녀의 이야기다. 쟁쟁한 장르물 주인공들을 가족으로 둔 소녀는 ‘쇼트쇼트’의 주인공임이 밝혀진다. 짧고 엉뚱한 상상력을 토대로 주인공이 쉽게 죽는 결말이 특징인 쇼트쇼트. 가족들은 소녀가 갑작스러운 결말로 죽을 것을 걱정하며 생활에 각종 제한을 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평범한 일상을 즐기지 못하는 소녀의 앞에 ‘현실’이 다가오는 듯 했으나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내 인생이 만화라면 무슨 장르일까, 한번쯤 엉뚱한 상상을 해 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구상하는 작가의 고뇌를 유쾌하면서도 살짝 섬뜩하게 전한다.
‘꿈이 있는 이야기’는 산타클로스 파견업 회사의 일본 칸사이 지사를 배경으로 한다. 매년 12월,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산타클로스들이 활약을 앞두고 일본 칸사이 지사로 찾아온다. 이 풍경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캐나다 출신 대니얼씨는 산타클로스를 지망하며 몇 번 오디션을 봤지만,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결국 같은 회사 총무과에 취직한 사람이다.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산타클로스들과 달리 어딘가 음울한 대니얼씨, 그는 프로 의식이 부족한 산타클로스들에게 불만이 많다. 삼류 산타들이기에 머나먼 일본까지 왔다고 말하며 질 낮은 산타들과 불쌍한 순록들에 대해 한탄한다. 누구보다 꿈과 사랑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산타에 진심인 대니얼씨는 결국 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작은 해프닝을 벌인다.
처음의 꿈이 좌절되었음에도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크리스마스 업계에 남은 괴팍해 보이는 대니얼씨. 그는 첫 꿈을 이룬 소수에만 주목하는 세상에서 계속 신념을 가지는 사람의 멋을 보여준다.
마치며
쿠이 료코 작가가 <던전밥>을 창작하기 이전부터 애정을 가지고 탐구하던 주제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집 3편을 살펴봤다. 작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모험의 그늘진 면모, 존재 의의를 다한 존재의 이후, ‘괴물’ 또는 '낯선 존재'와 함께 공존하기 등의 테마를 변주하며 연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세 작품집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야기가 한창 뜨겁고 강렬하던 지점을 지나, 이야기의 잔여물이 남은 흔적 속에서 미처 이야기가 될 수 없었던 후일담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다. 유머와 슬픔, 감동과 신선함이 담긴 단편들을 읽다보면 작가 쿠이 료코의 작품 세계 자체에 푹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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