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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Aug 29. 2020

우중 골프, 수중 골프. (1)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1)

장마가 지나가고 있나 봅니다. 조금 후덥지근 하지만 하루 종일 햇빛이 내리쪼인 날이었습니다.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걸었습니다. 오래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단독 주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아파트도 하나 보이지 않고 기와집이나 이층 양옥이 전부인 동네입니다. 오래된 마을이고 집과 집을 가르는 담이 정겨운 골목길을 만들어 줍니다. 길가에 나온 제라늄 화분이 짙은 보라색을 칠한 것처럼 보입니다. 공터에 해바라기가 익어가고 수석원의 감나무에는 매실처럼 작은 감이 탱글 거리며 달려있습니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고 향기를 낼 것 같은 시간입니다. 천변을 넘어가는 다리 위로 오르자 물이 제법 세차게 흐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 내렸던 비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나 봅니다. 그때는 비가 제법 왔었습니다.


 장마철이고 오전부터 비 예보가 있었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12시쯤엔 잔뜩 찌푸린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불길한 예감은 있었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할까요. 우리는 시작과 함께 내기를 했고 즐거운 기분으로 잔디를 걷고 있었습니다. 1번 홀도 2번 홀도 크게 승부가 갈리지 않았고 파 3였던 3번 홀에서 한차례 파도가 쳤습니다.


 거리는 170m였습니다. 두 사람은 레귤러 온을 했고 두 사람은 못 올린 상황이었습니다. 나 역시 올리지 못했고 거리는 맞췄으나 왼쪽으로 벗어나 러프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홀과의 거리는 30m 정도 되지만 그린은 높고 홀은 가깝게 붙어 있어서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린 앞 러프에 바운드시키는 범프 앤 런이나 높이 띄워서 떨어뜨리는 플롭샷을 구사할 생각을 하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센드 웨지의 페이스를 최대한 열고 연습 스윙을 합니다. 연습한 그대로 공을 쳐냅니다. 공은 높이 솟구쳤고 깃발이 있는 곳으로 날아갑니다. "굿 ~샷"하고 그린을 살피던 선배가 칭찬을 해 줍니다. 보고 싶은 마음에 급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생각보다 멉니다. 4m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린에 올리지 못했던 후배의 공은 프린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샷에서 실수가 나온 것 같습니다. 퍼터로 홀을 보고 공을 칩니다. 쭈빗쭈빗한 잔디를 지나온 공은 그린에 도달하자 빠르게 굴러갑니다. 홀을 휙 지나쳐 미련 없이 더 내려가다 섰습니다. 그린에 공을 올린 두 명의 선배는 먼 거리에서 퍼팅을 합니다. 먼저 한 선배는 3m 정도 못 미칩니다. 두 번째 선배는 거리를 잘 맞춰서 컨시드를 받습니다. 
 "합법적인 오케이네"하며 공을 집어 듭니다. 
 내 차례입니다. 약간은 내리막이지만 장마 중이라 그린이 느립니다. 느린 그린은 내리막도 제 힘으로 가야 합니다. 중력의 작용을 너무 믿어선 안됩니다. 끝에 가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휠 것입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머릿속에 그대로 입력합니다. 나머지는 스피드에 달려있습니다.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퍼팅의 스트록을 생각해 봅니다. 어드레스를 취하고 어깨의 움직임만 생각하고 출발합니다. 
 `하나~둘`
공은 정확하게 퍼터의 중심을 맞고 부드럽게 굴러갑니다. 고개를 돌려 홀을 볼 때 오른쪽으로 살짝 돌기 시작하더니 사라집니다. 누군가 박수를 칩니다. 가슴에서 무언가 휙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데 시원해집니다.





 온 그린 한 선배는 결국 넣지 못했고 후배 역시 오르막 퍼트를 실수하면서 더블 보기를 합니다.
더블 보기의 영향이었을까요. 후배는 다음 홀에서 티샷을 실수합니다. 좀처럼 티샷 실수가 없는 후배인데 왼쪽으로 심하게 당겨 치면서 소나무 맞는 소리가 났는데 굴러 나왔다고 합니다. 페어웨이에도 못 들어간 상황이라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격려해 줍니다. 산으로 들어간 공이 살아 나와서 다행이라고, 산신령이 던져 준 것 같다고 행운을 빌어 줍니다. 절치부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후배를 뒤로 하고 카트는 앞으로 갑니다. 그 홀에서 후배는 쓰리온 원 퍼트로 파를 합니다. 드라이브를 잘 친 나는 세컨드샷을 벙커로 넣고 보기를 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 후배는 담 홀에서 드라이브를 가장 멀리 치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파 5 오르막 도그렉 홀로 블루티 기준 500m 조금 넘는 긴 홀입니다. 핸디캡 일 번 홀이기도 합니다. 지금껏 투온은 본 적이 없습니다. 잠깐의 실수는 천추의 한이 되기도 하는 홀입니다. 두 번째 샷을 우드로 잘 보내 놓고 다른 사람의 샷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 선배가 오르막 경사에서 친 공이 오비로 사라집니다. 한 번 더 친 공 역시 오비가 나고 다시 여섯 번째 샷을 합니다. 옆에 있던 선배의 친구는 즐거워합니다. 후배를 보고 웃습니다. 
 "공에 뭐라고 썼어?"
 후배가 웃음 띤 얼굴로 아내가 어젯밤 깨알 같은 글씨로 써줬다고 자랑합니다. 우드를 들고 글씨가 써진 공을 치던 후배는 외마디 소리를 냅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캐디가 한번 더 치라고 소리를 칩니다. 세컨드 샷을 제대로 친 선배와 나는 잔디 위를 걸으며 서로 웃습니다.
 "그물이 두 개네"
 "고기가 두 마리 잡혀있네"
선배와 나는 파를 하고 두 사람은 양파로 스타일을 구깁니다. 다음 홀로 이동하면서 선배와 나는 돈을 세면서 비가 와도 좋을 것 같다고 낄낄대면서 웃습니다. 후배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지만 눈은 빛납니다.
 로스트 볼을 캐디에게 준 후배가 공을 다시 꺼냅니다. 공에는 여전히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골프한국>에 장보구의 (빨간벙커)로 연재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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