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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Nov 28. 2020

`말레비치의 사유`

 20세기에 들어서 화가들은 고민이 생겼다. 더 이상 그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화를 그리던 시절엔 근사한 성으로 가서 성주의 가족사진도 그리고 개별적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며 재능을 뽐내고 수입도 얻었지만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초상화의 영역을 침범당하자 화가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그들은 이제 성안에 머무르지 않고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갔다. 때마침 튜브가 발명되어 물감을 사용하기 편해진 점도 작용했겠지만 초창기 카메라가 잡을 수없는 풍경을 캔버스에 그리면서 새로운 유행을 이끌어간다. 빛에 의해 색상이 변하는 사물의 `인상`을 포착하면서 `인상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이후로도 많은 그림의 사조가 있지만 `인상주의`화가들이 유독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클로드 모네와 르느와르와 같은 화가들의 전시회 때 늘어선 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랑받는 이유야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가 `아날로그 감성`이 아닐까. `인상주의`화가의 풍경화나 인물화를 보면 확실히 편안하고 거부감 없이 동화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지나친 과장이 없이 자연스러운 형태와 색채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는 옛것을 말하고, 오래된 것들은 공통적으로 편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정서적 편함과 기능적 불편함이 그것일 것이다. `기능적 불편함`이란 과학의 발전과 연관 지으면 쉽게 이해될 것이고, `정서적 편함`은 살아오면서 접촉 해온 익숙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철저히 현실적 기반 위에 형성된다 할 것이다.


 `아날로그 감성`은 사유의 시간을 주고,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은 사유의 여백을 허락한다고 보이는데 `인상주의 `화가가 사랑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연못에 비취는 윤슬마저 각기 다른 느낌으로 표현하던 `인상주의`시대가 지나고 화가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는데 더 이상 그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화도 전설도 인물도 풍경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20세기 화가들의 사유는 철학적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클레, 말레비치로 연결되는 이때의 화가들은 (점, 선, 면)이나 구상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이들이 사물을 보는 방법은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말레비치는 `모든 형태는 삼각형, 원형, 사각형과 같은 기하 형태로 귀결된다.`고 했는데 그가 그린 `나무꾼`은 이 말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보이는 대상을 단순화시키는 화가들을 보면 `시인`이 생각난다. 보이는 것을 삭제하고 최소화시키는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선과 면을 찾아가는 화가를 통해서 `시인`을 보게 된다. 시는 궁극적으로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통찰의 결과물일 것이다. 호메로스와 길가메시 서사시 이후로 많은 사조를 거치면서 `시인`은 노래하고 탄식했다. 끊임없이 단어를 연마하고 문장을 꿰매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나의 사유는 여기서 출발한다. 20세기 화가들이 고민했듯이 내가 고민하는 지점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편안함에서 오는 사유. 그 느슨하게 지나가는 시간의 결에서 나는 묻는다.`무엇을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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