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구 Apr 06. 2021

17번 국도에서 만난 봄 (2)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내려오는 길 쪽으로 그늘진 곳이 많아서인지 아직 맨몸으로 서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한적하고 정돈되지 않은 산길을 느린 속도로 내려오면서 잠시 어떤 회한에 잠겼다. 재를 넘나들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구불한 길을 오르내리던 느린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서 거기 있었다. 누군가의 추억과 행복했던 시간이, 아픔과 슬픔의 흔적이 정지된 시간처럼 갇혀있었다. 때로 우리는 삶의 힘든 곳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고 행복했던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비루하고 부박한 인생의 질곡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염원하기도 한다. 지독한 외로움에 홀로 서본 사람은 안다. 외로움의 순간에도 봄은 오고 꽃이 진다는 것을.  어느 순간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미련이 남아도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건너편 산의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이 산그늘에 나목으로 서있는 나무가 부러워하듯, 삶은 그런 것이란 것을.


 좁은 도로를 빠져나와 17번 국도로 합류했다. 앞산은 병풍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 멋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상록활엽수가 많은 산은 가을엔 단풍으로 아름답고 봄에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잎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차창 밖에서 다가오는 봄산은 마치 병풍을 절반쯤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구례구역을 지난 길은 섬진강을 따라간다. 강의 위쪽으로 향하는 이 길은 수량이 많지 않아 강의 속내를 볼 수 있다. 군데군데 드러난 모래톱과 강 자갈 사이로 자란 수초와 버드나무도 있다. 다리가 긴 새도 보이고 참새나 산비둘기도 무리 지어 날아간다. 강 건너편 도로에 핀 벚꽃은 지는 순간 연보라색 꽃으로 보인다. 돋아난 새잎의 연두색과 매달린 꽃잎이 섞이며 보여주는 색체는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다. 하나씩 개별적으로 볼 때는 분명한 색상이지만 매일 변화하는 봄의 색상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매화도, 벚꽃도, 배꽃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피어나는 저 산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이 흐르고 산이 보이자 아까 송치재를 넘으며 접어둔 병풍의 나머지가 펼쳐진 것 같았다. 여러 폭의 동양 산수화를 담는 기분이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 물에 잘 녹아버린다고 알려준 사람은 아내였다. 사람들이 답답하고 우울할 때 바다에 가거나 목욕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진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울이 씻겨나간 것인지, 바다로 흘러들어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을 바라보면 맘이 편해짐을 느낀다. 

 이 강물은 어딘가에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도착하는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바다에 이를 것이다. 물은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낮은 곳을 향하고 밤낮으로 쉼 없이 흘러간다. 산을 넘을 때도 대지를 적실 때도 편법을 부리지 않고 묵묵하다. 서로 다른 물줄기끼리 만나서 한 곳으로 흘러가고 때로 멈춘 듯 하지만 결국 바다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안다. 어떤 위대한 정신도, 사상도, 종교도 삶의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단지 그것이 제시하는 것은 방향이란 것을. 

 낡고 오래된 자동차로 산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나는 봄처럼 피어나는 꿈을 떠올렸고, 굽이치며 흐르는 강물 앞에서 언젠가 이르게 될 죽음을 생각했다. 


 나는 강물에 부서지는 윤슬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봄 속에 있음을 고마워했다.


작가의 이전글 주식에서 골프를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