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구 Apr 10. 2021

가시로 만드는 인간관계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탱자나무는 골프 연습장 가는 길에 있다. 산모퉁이에 있는 연습장에 가려면 민가를 지나야 하는데 오래전 담장이었을 탱자나무 울타리를 보게 된다. 잎을 떨군 탱자나무는 짙은 녹색의 가지가 언뜻 사철나무처럼 보인다. 다가가면 섬뜩한 가시가 보인다. 크고 억센 가시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탱자나무도 꽃을 피웠다. 가시 위로 피어난 하얀 꽃은 선명하고 곱다. 무서운 가시와 여린 하얀 꽃은 왠지 안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다. 탱자나무 꽃은 쑥버무리의 하얀 고물처럼 핀다. 작은 꽃은 범벅처럼 가시 사이를 감싸고 있다. 찔레도 장미도 이쁜 꽃을 피우는데 ' 가시 있는 꽃이 아름답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탱자나무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해미읍성을 ' 탱자 나무성 '으로 부르는데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예전 중죄인의 유배형 중에 ' 위리안치 '가 있었다. 귀양간 곳의 집 둘레를 탱자나무로 두르고 달아나지 못하게 가두는 방법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 가택연금 '같은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 자가격리 '일 것이다. ' 자가격리 '는 스스로 주변과 격리되어 추가 감염을 막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격리라는 부정적 단어 앞에 자가를 붙여서 마치 자율적으로 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격리자를 위축시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 자가격리 '와 ' 위리안치 '사이에는 자율과 타율의 차이가 있지만 느낌으로 와 닿는 간격은 엄청나다. 둘 다 같은 격리와 감금이지만 타인에 의해 강제로 당하는 것과 스스로 자신과 주변을 걱정해서 고립으로 가는 것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를 썼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인맥을 과시하기도 하고 마치 재산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정을 나누기 위해 끈끈하게 접촉하고 자신의 입술에 적신 술잔을 가슴 한 구석에 숨겨둔 마음인 양 내밀기도 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워도 표정으로 서로를 알아주었고 술에 취해 싸워도 담날이면 잊고 다시 술잔을 부딪히며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아쉽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벌써 중세시대의 얘기처럼 아득하다. 

 코로나 19의 시대가 길어지면서 삶의 패턴도 많이 바뀌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 가시 많은 탱자나무처럼 접촉을 허락하지 않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 19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고립과 격리를 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명절 때도, 어떤 행사에도 가지 못했거나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제 탱자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만들었고 스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출근을 위해 조심스럽게 나왔다 퇴근 후 다시 그곳으로 들어간다. 고립과 격리를 구속으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탱자나무로 찾아오는 참새처럼 가시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모른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틈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24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탈이 난다.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사람이 귀하게 느껴진다. 부부 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도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 가깝고 허물없는 사이일수록 간격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세상에 나와 닮은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갈등을 만들고 상처를 주는 간극은 서로에게 가시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가시가 있지만 드러내지 않고 조심할 뿐이다. 탱자나무 가시가 옆 가지를 찌르지 않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17번 국도에서 만난 봄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