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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피렌체 `

by 장보구

비에 젖어 더 까만 돌바닥은 미끄러웠다. 골목길로 내려가면서 광장의 분수. 크로와상과 에스프레소를 내주던 베이커리와 밤이면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던 바르(bar)를 바라보며 눈인사를 했다.

내리는 비는 풍경을 더 또렷하게 구분해 준다. 비에 젖어 짙어진 나무나 풀, 바랜 지붕의 붉은색도 물기에 번들거리며 까매진 골목의 검은 돌도. 선명하지만 아련하기도 한 아침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일행들은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차창에 흐르는 빗물사이로 오래된 도시가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말했다. " 안녕. 팔레스트리나. "

( 밤마다 걸었던 저수지에는 나 말고도 산책 나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중에 내 또래의 키 작은 여자애가 시집을 한 권 들고 걷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 번 마주쳤지만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달빛에 하얗게 핀 개망초가 더없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몇 가닥을 꺾어서 손에 들고 걷고 있는데 물가에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달빛에 비친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들고 있던 꽃을 건넸고 함께 웃었던 기억은 남아있다. 그 뒤로 우리는 어두워지면 만나서 별을 보고 걸었다. 그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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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가로수로 심어진 우산 소나무는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버스는 로마를 지나 피렌체로 향하고 있었다. 토스카나 지방으로 가면서 풍경은 나의 혼을 빼놓았다. 완만한 언덕, 깔끔하게 정돈된 푸른빛의 구릉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길게 늘어진 곳에 자리한 하얀 저택. 구릉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좁다란 길과 가끔은 촘촘하게 난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은 영화에서 보던 이탈리아의 전원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어제와 다르게 확 바뀐 정경에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가 오르막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더니 다비드 상이 있어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명명된 곳에 멈췄다. 생전의 미켈란젤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곳이지만 피렌체 시내와 아르노 강이 내려다보이고 두오모 성당의 멋진 모습을 보기 좋은 곳이라 관광객의 핫 플레이스로 알려진 곳이었다. 광장에 세워진 다비드상은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몸매였다. 골리앗을 바라보며 돌팔매를 하기 직전의 긴장된 근육을 포착한 작품으로 해부학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미켈란젤로의 걸작이라고 하지만 진품은 아니라고 안내자는 알려준다. 화려한 대리석 기단에 세워진 다비드 상은 역광 때문인지 윤곽만 보였다. 음영으로 드러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소년 다비드가 아닌 다윗왕의 모습으로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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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화영은 `피렌체로 가는 열차는 오후 세 시에 떠납니다.`라는 문장을 영화에서 만났고, 이 문장이 자신을 지중해로 이끌었다고 했다. 그가 쓴 `지중해 내 푸른 영혼`을 읽었던 젊은 날의 나는 못처럼 벽에 박혀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가방하나 들고 쉽게 떠날 것 같았는데 유배지에 묶인 죄인처럼 스스로를 유폐하고 있었다. 녹슬어 가고 있었다. 그날 흰구름이 나를 이끌지 않았더라면 삭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피렌체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베키오다리가 있는 곳이고 냉정과 열정의 주인공이 두오모에서 다시 만나는 곳이다. 믿음이 질문보다 앞선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의 본향인 곳이다. 예술가와 천재들이 모여서 지적유희를 즐기고 과학의 발견을 통해 논리와 검증의 지평을 열었던 곳이다. 내 젊은 날의 염원과 사랑, 그리고 메타포가 되어 나를 이탈리아로 이끌었던 도시다.

잘 정돈된 시내를 걸으면서 이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안내자의 얘길 들었다. 건물은 두오모 성당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은 비슷한 모양 같지만 조금씩 달랐다. 로마에서도 그랬지만 가로수가 없어 벽면이 노출된 상태의 건물은 회벽이나 벽돌, 대리석이 그대로 드러나 마치 커다란 컨버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제 막 틀을 짠 원형의 컨버스 같기도 하고 채색된 지 오래된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한다. 밋밋해 보여도 전체적인 색상이 은근하고 고풍스러워 질리지 않고 각 건물의 입구의 모양과 장식이 달라 비교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길로 들어서곤 한다. 안내자가 대리석에 박힌 쇠로 된 원형의 고리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말의 고삐를 매 두던 곳이에요." 길가에 한 줄로 주차된 자동차가 있는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지만 여기는 중세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간 파스타를 파는 식당은 오백 년 전 건물이라고 했다. 빛바랜 성화가 그려진 벽면은 오래된 절집의 탱화처럼 영험해 보였다. 그림사이에 벽걸이용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벽색상에 맞춰서 칠을 해 놔 처음엔 에어컨인지 몰랐다. 보호색을 띤 채 중세의 유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에어컨을 보면서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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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앞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세계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단체로 모여있는 곳은 지나가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은 많은 사람들의 사진 속 배경이 되고 있었다. `디지털은 저장하는 것이고, 아날로그는 기록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생각이 미치는 순간 카메라에 담고 저장하고 떠난다. 나는 저장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기록도 잘 못한다. 순간의 느낌을 기억하려 애쓰는 나 같은 사람을 뭐라 부르는지 모른다. 보고 느낀 것을 최대한 가슴에 기억하려 하는 나는, 사진을 찍는다든지 기록을 하는 것은 뒷전이다. 다가온 느낌과 감정이 사라져서 싫다. 즉물적으로 다가온 실체와 조응하고 감흥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정은 피렌체를 둘러보고 가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어서 북부로 이동해야 했다. 나의 피렌체는 짧은 면회를 허락한 셈이었다. 언젠가, 아르노 강변을 바라보며 카푸치노를 마시고 베키오 다리를 건너 우피치 미술관에 갈 수 있길 바란다.

버스는 베네치아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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