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하 Jul 13. 2022

말썽꾼 프로그래머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시작

페이스북(메타)의 역사와 시사점 (1)

페이스북(메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인상적인 성공 스토리부터 인스타그램 합병, 개인정보 유출 및 독과점 논란까지, 페이스북에 대해서 꾸준히 많은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크 저커버그가 어떤 사람이며 페이스북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페이스북에 대한 기업 분석 콘텐츠를 작성했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독서모임을 통해 페이스북의 역사에 대해 다룬 책 [메타 페이스북]을 읽게 되었습니다. 800쪽에 달하는 책에는 페이스북과 저커버그의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고, 저는 페이스북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긴 만큼 앞으로 세 개의 콘텐츠를 통해 이를 정리하고 공유할 예정인데요. 과연 저커버그의 여정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색다른 시사점을 제공할지 기대가 됩니다!


[페이스북의 역사와 시사점] 시리즈 목차

1. 말썽꾼 프로그래머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시작

2. 뉴스피드의 원조! SNS의 역사를 써 내려간 페이스북

3. 사랑받는 기업에서 논란의 중심으로! 페이스북의 미래는?



어린 컴퓨터광 마크 저커버그의 의지와 재능

'마크 엘리엇 저커버그(Mark Elliot Zuckerberg)'는 정신과 의사인 어머니 '캐런 저커버그'와 치과 의사인 아버지 '에드 저커버그' 사이에서 1984년 5월 14일에 태어났습니다. 애플의 매킨토시가 출시되고 넉 달 가까이 지난 시기였습니다. 아버지 에드는 기술과 장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흔하지 않던 컴퓨터와 모뎀을 갖고 있었고, 직접 웹사이트도 만들어서 운영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마크 역시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의지력과 집요함도 대단했는데요. 그는 10살 때 C++(프로그래밍 언어) 안내서를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부탁하고, 실력에 맞는 수업을 찾지 못해서 지역 대학원의 수업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방과 후에 강좌를 듣고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집에 오면 남은 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소프트웨어를 짤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고등학생이 된 마크는 공립고등학교에서 2년간 다니다가 컴퓨터 수업이 있는 이름난 프렙 스쿨(한국의 특목고와 유사한 개념)로 진학했습니다. 마크는 그곳에서 자신처럼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갖던 친구 '애덤 댄절로'를 만났고,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그들은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들은 졸업 과제로 개인 맞춤형 가상 디제이 '시냅스'를 만들었는데, 고등학생 시절에 사실상 초기 버전의 인공지능 서비스를 만든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크와 댄절로는 2002년 각각 하버드와 칼텍(Caltech,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마크는 서비스 이름을 '시냅스-ai'로 바꿔서 비공식적으로 출시했습니다. 시냅스-ai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100만 달러의 인수를 제안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3년간 일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들은 인수를 거절하고 각자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추후 마크가 페이스북을 창업한 이후, 댄절로는 페이스북에 합류하여 2008년까지 CTO이자 엔지니어링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퇴사한 이후에는 Quora 창업 및 인스타그램 초기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하버드의 말썽꾼 저커버그의 프로젝트

마크 저커버그의 동기들은 그가 대학생 시절에 매일같이 코딩을 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페이스북 이전에도 몇 가지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2학년이 된 마크의 첫 프로젝트는 '코스 매치'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하버드 웹사이트에서 수업 목록을 추출하여 만든 사이트로, 자신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자신이 신청한 과목을 표시하면 자신 이외에 누가 그 과목을 선택했는지 볼 수 있는 서비스였습니다. 그리고 해당 친구가 또 어떤 과목을 듣는지도 볼 수 있었는데요. 당시 마크는 본인의 노트북으로 웹사이트를 호스팅 했는데, 금세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여 노트북이 타버리기도 했습니다. 서비스의 인기를 지켜본 마크는 이때 사람들이 자기 주위 사람들의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다음 진행한 프로젝트는 큰 논란을 일으켰고, 마크는 이로 인해 하버드에서 퇴학당할 뻔했습니다. 바로 외모 평가 프로젝트 '페이스매시'인데요. 이는 두 명의 사진을 비교해서 외모를 평가하게 만든 서비스입니다. 당시 마크는 금고털이처럼 기숙사별 웹사이트를 뒤져서 수많은 하버드생의 사진과 정보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사흘간 코딩하여 서비스를 완성했는데, 서비스는 입소문이 나서 출시 후 몇 시간 만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허락받지 않고 정보를 긁어와서 만든 페이스매시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버드의 몇몇 여학생 단체에서 분노가 쏟아졌고, 불평과 트래픽 부하 사이에서 말썽을 겪고 싶지 않던 저커버그는 사이트를 폐쇄하였습니다.


당시 하버드의 전산망 관리 부서는 트래픽 요청에 대처하기 위해 마크가 지내던 기숙사 전체의 인터넷을 차단하기도 했습니다.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하버드는 사건을 조사해 통신 시스템을 해킹하고 저작권과 학생 프라이버시를 훼손했다고 판단하여 집행 유예에 해당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또한 저커버그는 여학생 단체에 사과하며 그들을 위해 컴퓨터 작업을 해주기로 했죠. 저커버그가 페이스매시 사건으로 깨달은 가장 인상 깊은 교훈은 잘못된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그 이유였습니다. 몇 년 뒤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을 때 저커버그는 자신이 페이스매시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이 자신과 지인의 사진 보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가였다고 답했습니다.


이렇듯 저커버그는 여러 프로젝트에 전념하느라 평소 수업에 소홀하곤 했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수업을 들을 때 그는 프로그래밍에 박차를 가하느라 기말고사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평소 스터디 그룹을 꾸려 도서관에서 모이는 방식을 비효율적으로 생각한 저커버그는 프로그래밍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강좌 웹사이트의 이미지를 모조리 내려받은 후,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링크를 보내고는 같이 공부하자고 초대한 것입니다. 이미지를 보여주고 자신이 보기에 무엇이 중요한지 댓글로 남기게 하는 온라인 스터디 방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댓글로 공유했고, 저커버그는 기말고사에서 1등을 했습니다.


더페이스북의 출현

하버드에서 논란이 된 마크의 페이스매시 사건은 온라인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3학년생 세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들은 동급생들을 연결하여 소개팅 혹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웹사이트를 만들고자 했고, 팀 이름을 '커넥트유'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내내 구상해도 서비스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그들은 저커버그에게 연락했습니다. 저커버그는 합류하고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나 몇 주가 지난 이후에는 마감을 어기고 변명을 일삼았습니다. 그러고는 2004년 1월에 그만두겠다고 말했죠.


사실 저커버그는 잠재 경쟁자의 시간을 끌고 남몰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크 역시 하버드 학부생을 위한 온라인 사진첩을 만들고 있었는데요. 당시 이러한 아이디어가 참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크가 고등학생 때 같은 학교 친구가 비슷한 서비스를 만든 적이 있으며, 이미 다른 몇몇 대학교에는 존재하던 서비스였습니다. 심지어 하버드 학생도 이전에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한 적이 있었는데, 인기가 없어서 금방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페이스북이 성공한 이후 커넥트유팀은 소송을 제기하여 65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았습니다)


이전 프로젝트에서 교훈을 얻은 마크는 서비스가 잘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코스 매치'를 통해서 사람들이 친구의 정보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페이스매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친구들의 사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기꺼이 무료로 내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04년 1월 11일 더페이스북닷컴(thefacebook.com) 웹사이트가 탄생했습니다. (페이스북닷컴 도메인은 이미 누군가 선점하여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전 논란으로 저작권의 중요성을 깨달은 마크는 이제 데이터를 긁어오지 않고 유저가 직접 정보를 남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프라이버시를 위해 서비스에 가입할 때 하버드 이메일로 신원을 검증했으며, 유저가 자신의 콘텐츠 중 무엇을 누구와 공유할지 제한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가입한 유저들은 실물 인명록의 두 줄짜리 소개란보다 훨씬 많은 공간을 할당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애 상태'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입력할 수 있었으며, 전화번호나 AOL 인스턴트 메신저 대화명 같은 개인 정보, 자신의 관심사, 정치 성향, 좋아하는 책, 수업, 명언 등을 올리는 공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웹사이트가 등록된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하버드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서비스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서비스의 가능성을 본 저커버그는 2004년 2월 4일 더페이스북을 공식적으로 출시하고, 동아리 친구인 에드와도 새버린을 설득하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커버그가 소유권의 3분의 2를 갖고, 1만 5천 달러를 기탁한 새버린이 나머지 3분의 1을 갖는 지분 구조였습니다. 이후 더페이스북 팀에는 몇 명이 더 합류했는데요. 우선 비전공자이지만 금방 프로그래밍을 배워 이후 더페이스북을 새 캠퍼스들에 이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된 '더스틴 모스코비츠', 마크가 내켜하지 않던 대외 홍보 업무를 맡았던 마크의 기숙사 룸메이트 '크리스 휴스', 그리고 초기 페이스북의 디자인 작업을 맡은 '앤드루 매콜럼'입니다. 이렇게 5명의 공동창업자는 하버드를 넘어 칼럼비아, 스탠퍼드, 예일 대학교를 시작으로 몇 달간 100여 곳의 캠퍼스에 서비스를 진출시켰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은 '메타 페이스북'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시작이 주는 시사점

저커버그의 유년기와 페이스북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저는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10살에 프로그래밍 책을 사서 공부하고 대학원 수업을 들을 정도였으니 사실 마크에게는 환경을 넘어서는 노력과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말한 '환경'은 조금 더 일반적인 마크 저커버그 주변인 입장에서의 환경인데요. 서비스를 출시하지도 않았지만 합의금을 받아낸 커넥트유팀과 마크의 공동 창업자들은 자기 근처에서 창업한 사람이 우연히 '마크 저커버그'이고 그 회사가 우연히 '페이스북'이었기에 엄청난 부와 성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하버드 학생이며 뛰어난 재능과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 창업자들이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마크도 그들과 같이 사업을 시작했으며,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겠죠. 


최근 들어 IT가 발달하고 비대면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대학교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학교의 교육 내용 자체는 온라인 등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교는 교육 외에 커뮤니티의 가치도 지니고 있습니다. 저 역시 대학교에서 공부했던 내용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대학교 시절의 친구들과는 계속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만난 뛰어난 친구들 덕분에 저도 더 넓은 시야를 갖고 더 노력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대학이 동일한 커뮤니티의 기능을 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면 커뮤니티의 기능도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과 커뮤니티는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이라 대체될 수는 있어도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연 앞으로의 커뮤니티와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커뮤니티에 속하고 싶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는 8가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