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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하 Jul 20. 2022

뉴스피드의 원조! SNS의 역사를 써 내려간 페이스북

페이스북(메타)의 역사와 시사점 (2)

페이스북(메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인상적인 성공 스토리부터 인스타그램 합병, 개인정보 유출 및 독과점 논란까지, 페이스북에 대해서 꾸준히 많은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크 저커버그가 어떤 사람이며 페이스북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페이스북에 대한 기업 분석 콘텐츠를 작성했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독서모임을 통해 페이스북의 역사에 대해 다룬 책 [메타 페이스북]을 읽게 되었습니다. 800쪽에 달하는 책에는 페이스북과 저커버그의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고, 저는 페이스북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이 긴 만큼 시리즈 콘텐츠를 통해 이를 정리하고 공유하고 있는데요. 과연 저커버그의 여정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색다른 시사점을 제공할지 기대가 됩니다!


[페이스북의 역사와 시사점] 시리즈 목차

1. 말썽꾼 프로그래머 저커버그와 페이스북의 시작

2. 뉴스피드의 원조! SNS의 역사를 써 내려간 페이스북

3. 사랑받는 기업에서 논란의 중심으로! 페이스북의 미래는?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페이스북

"언젠가는 이익이 나는 걸 만들 거라고 생각해요. 내 말은 그러니까, 하버드 출신이라면 누구나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나 소셜 네트워크를 가질 순 없죠."


저커버그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실리콘밸리로 향했습니다. 당시 하버드 내의 신문사 기자가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저커버그는 위와 같이 대답했는데요. 저커버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비전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입성한 페이스북은 냅스터를 창업한 경험이 있던 숀 파커의 도움을 받아 시드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당시 80%에 달했던 페이스북의 재방문율은 많은 투자자의 이목을 끌었고, 페이팔 창업자 출신인 피터 틸의 투자 회사로부터 50만 달러를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 페이팔을 매각하고 링크드인을 창업한 리드 호프먼과 냅스터에 투자했던 마크 핀커스도 각자 37,500 달러를 투자하였습니다. 


초기 투자를 유치한 페이스북은 빠르게 성장을 이어나갔습니다. 서비스를 출시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2004년 12월에는 이용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고, 이듬해 시드 투자의 약 20배에 달하는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시리즈A 투자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이후 페이스북은 20만 달러에 도메인(facebook.com)을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인력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글이나 HP 출신의 거물급 개발자는 물론 대학교 재학생들도 열심히 채용했는데요. 그렇게 채용된 페이스북의 엔지니어는 모두 입사 첫날 개발 환경을 설정하고 버그를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네다섯 번씩 코드를 배포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페이스북의 두 번째 여름인 2005년 6월 마크 저커버그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그 해 목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계획한 것으로 그룹, 담벼락, 사진 태그 기능 등이 있었는데요. 특히 사진 태그 기능은 큰 인기를 끌었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페이스북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진 공유 사이트가 되었습니다.


뉴스피드가 도입되기 이전인 2005년 페이스북의 프로필 페이지


SNS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페이스북

이후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대학 네트워크에서 인터넷 거인으로 탈바꿈시킬 두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 많은 소셜 서비스가 차용하고 있는 '뉴스피드'로, 이는 2005년 여름에 저커버그가 제시한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페이스북의 로그에 따르면 기존까지 수많은 유저들은 자기가 활동의 맨 위에 올라와 있는지 보려고 친구 명단을 알파벳 순서로 훑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소셜 네트워크가 비슷한 방식이었는데, 페이스북은 이를 비효율적으로 느끼고 새로운 기능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고객지원팀은 뉴스피드가 도입된다면 사람들이 질겁할 것임을 알아차렸지만, 이런 우려는 기우로 치부되었습니다. 이미 서로의 프로필을 보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죠. 오히려 페이스북에서 논란거리가 된 것은 상업적인 우려였습니다. 기존 페이스북 사이트의 비효율적인 동선은 회사에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친구들의 소식을 확인하고자 페이지를 이동해 다니면서 더 많은 광고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2006년 9월 5일 새벽 1시, 뉴스피드가 개시되었습니다. 저커버그가 처음에 페이스북을 만드는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은 것과 비교하여 개발 기간만 6개월 이상이 걸린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리고 뉴스피드가 시작된 다음날, 페이스북 회사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고 TV 위성 광고 방송 트럭이 길을 막았습니다. 팰러알토 경찰서는 대규모 군중 시위에 대처할 인력과 장비가 없다며 시위대가 물러날 수 있도록 뉴스피드 기능을 중단하라고 페이스북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페이스북이 몰랐던 것은 정보를 사람들에게 내보내는 것과 정보를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것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발이 거세지자 사이트를 뉴스피드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진지하게 고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그를 들여다보던 페이스북 팀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수십만 이용자가 반감을 드러냈지만, 정작 그들이 어느 때보다 페이스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저커버그가 사과문을 올리고, 콘텐츠 공개 범위 설정 기능을 추가하면서 상황은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은 뉴스피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페이스북의 초기 뉴스피드 모습


이후 페이스북은 다음 프로젝트를 도입하면서는 조금 더 신중을 가했습니다. 바로 오픈레지(Open Registration)라고 불리는 '가입제한 해제' 프로젝트인데요. 페이스북을 대학 네트워킹 프로그램에서 범용 소셜 서비스로 전환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페이스북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오픈레지는 꼭 필요한 절차였지만 위험이 따랐습니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여기는 대학생들의 기반을 잃을 우려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페이스북은 위험을 줄이기 위해 점진적으로 서비스를 개방하는 방안을 선택했습니다. 첫 단계는 고등학교로 확대하는 것이었는데요. 꽤나 잘 통한 방법이었지만, 미국 전역에 1000~2000개가 존재하는 대학과 달리 미국의 고등학교는 4만여 곳에 있었고, 고등학생들은 대학생들만큼 서비스에 몰입하지 않았습니다. 2006년 봄에는 학교가 아니라 회사를 기반으로 삼는 '워크 네트워크스'를 출시해 교육 영역 너머까지 개방을 시도했지만, 사람들은 개인적인 삶을 직장과 분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오픈레지로 서비스를 일반 유저에게 모두 공개하기로 한 페이스북은 뉴스피드와 같은 논란을 겪지 않게 위해 출시에 신중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오픈레지가 등장했을 때는 반대하는 그룹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수백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2006년 말에서 2007년으로 접어들면서 지지부진하던 이용자 수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페이스북의 F8 컨퍼런스


플랫폼 제국을 꿈꾼 페이스북

오픈레지 전부터 페이스북의 가입자 수가 유출되면서 페이스북을 인수하려는 기업이 장사진을 쳤습니다. 마이스페이스와 바이어컴은 물론 구글도 매각을 제안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이용자가 수억 명에 달하던 야후도 10억 달러를 제안했는데 저커버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저커버그에게는 아직 달성할 목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플랫폼(Platform)'이라는 기능인데요.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페이스북 데이터를 이용해 소셜 앱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기술적 통로를 의미합니다. 현재 안드로이드와 iOS에서 여러 앱이 작동하는 것처럼, 페이스북을 하나의 거대한 플랫폼으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2007년 당시는 애플이 아이폰을 공개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이폰을 구입할 수 있는 6월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은 2007년 5월 24일에 자체 콘퍼런스 F8을 통해 '플랫폼'을 공개하고 실행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고, 페이스북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기술 분야 엘리트들은 페이스북을 여전히 대학 사이트로 치부하고 있었는데, F8이 인식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저커버그는 2000만 명에 이르는 페이스북 이용자가 하루에 10만 명씩 증가하고 있으며, 트래픽이 세계 6위임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플랫폼에 개발자 5000명을 유입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고작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를 받던 '플랫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팸 앱과 게임 앱으로 도배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개발자가 페이스북 API를 이용해 자신들의 앱에 대한 콘텐츠를 유포했고, 뉴스피드는 쓰나미가 휩쓸고 간 해변처럼 지저분한 게시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데이터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공개하겠다고 설정하지 않은 이용자들의 개인 정보도 공유되고 있었는데, 이는 이후 발생할 거대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발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은 여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뉴스피드를 도입하기 이전까지 페이스북은 광고주가 웹을 이용해 특정 캠퍼스를 대상으로 배너를 싣는 간단한 광고 상품만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페이스북은 뉴스피드에 광고를 싣는 '스폰서 게시물', 기업이나 단체가 프로필을 가질 수 있는 '페이지'를 도입하며 광고 시장을 개척해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와 광고 판매 계약을 체결하고 투자를 받았는데, 이때 MS는 페이스북의 가치를 150억 달러로 추산하여 지분 1.6%를 받고 2억 4000만 달러를 투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야후의 10억 달러 제안을 일축한 저커버그를 멍청이라고 생각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던 시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MS의 투자를 비웃었지만, MS가 현금화할 즈음 페이스북의 1.6%는 80억 달러를 웃돌았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은 '메타 페이스북'

SNS의 역사를 써내려간 페이스북이 주는 시사점

페이스북은 많은 스타트업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형태로 진화를 거듭한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저커버그는 (흔히 MVP라 부르는 형태로) 간단한 서비스를 출시하였고, 이용자가 원하는 서비스인지 확인했습니다. 유저의 니즈를 파악한 후에는 초기 투자를 받아서 빠르게 사업을 키워나갔죠. 페이스북팀은 투자금을 활용하여 좋은 인재를 채용했고, 성장 속도가 정체될 때마다 뉴스피드와 오픈레지 등의 새로운 기능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비록 초기에 매출은 거의 없었으나, 방대한 유저 수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익 모델을 마련하여 페이스북은 결국 큰 수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장 방식은 그동안 스타트업 생태계(특히 플랫폼 및 소셜 네트워크 산업)에서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실제로 여전히 많은 스타트업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수익 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금리가 상승하고 투자 여건이 악화되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변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스타트업에게 성장만을 바라던 투자자들이 점차 안정과 수익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근의 경기 침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당장 매출이 없더라도 유저가 빠르게 증가한다면 페이스북과 같은 기업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까지 시중에 자금이 많이 풀려서 수익이 없는 기업들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며, 앞으로는 투자를 받지 못해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에 정답은 없고, 모든 스타트업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생존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태계의 흐름 정도는 고려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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