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의 역사와 시사점 (2)
여러분은 '픽사(PIXAR)'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우선 픽사가 제작한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인크레더블>, <업>, <인사이드 아웃> 등 수많은 인기 애니메이션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모든 픽사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마스코트 램프 스탠드를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램프 캐릭터의 이름은 룩소 주니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제작해온 픽사는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픽사가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 픽사의 역사: 컴퓨터 회사에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2. 픽사의 문화: 픽사는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 콘텐츠 본문은 에드 캣멀의 저서 <창의성을 지휘하라>를 참조하였습니다
에드 캣멀은 '정직'이라는 단어가 부담을 준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정직한가요?'라고 물어보면 도덕적으로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honesty)'이라는 단어 대신 뜻은 비슷하지만 윤리적 함의는 적은 '솔직함(candor)'으로 대체해서 사용했는데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실무단, 부서, 기업 직원들이 솔직하게 소통하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요?
캣멀은 솔직함을 제도화하는 방법들을 오랫동안 모색했고, 그렇게 브레인트러스트(Braintrust)라는 시스템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브레인트러스트는 몇 달에 한 번씩 모여 각자 제작 중인 작품을 평가하는 시스템으로, 해당 시스템의 근간은 간단합니다. 영리하고 열정적인 직원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하라고 맡기고, 서로 솔직하게 의견을 얘기하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픽사의 브레인트러스트는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제작과 편집을 주도한 핵심 인력 다섯 명으로 시작되었는데, 항상 참석하는 고정 회원은 없습니다. 스토리텔링에 재능만 보여주면 감독, 시나리오 작가, 스토리부서 팀장 등 다양한 사람들이 브레인트러스트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브레인트러스트의 참석자들은 스토리 릴(스토리 보드를 사용하여 제작한 초벌 영상)을 보고 미흡한 점, 개선할 점, 문제점을 토론합니다.
사실 이러한 제도는 다른 기업의 피드백 메커니즘과 유사해 보입니다. 이에 대해 캣멀은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하나는 픽사의 브레인트러스트는 스토리텔링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픽사의 브레인트러스트는 주로 핵심적인 직책의 직원들이 참여하지만 이들이 지시할 권한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 인크레더블의 스토리 릴을 상영할 때, 밥(아빠 역할의 미스터 인크레더블)이 헬렌(엄마 역할의 엘라스티걸)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때 브레인트러스트에서 밥이 헬렌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대사를 바꾸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담당자는 대본의 수정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문제의 원인을 찾다 보니 덩치의 차이 때문에 여자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헬렌이 주장을 펼칠 때 능력에 맞게 몸이 쭉 늘어나면서 소리치게 했더니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결국 캣멀이 생각하는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회의 참석자들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피력하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보호하고, 필요하면 방식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직원들이 회의실보다 복도에서 더 솔직하게 소통하는 기업에서 일하고 싶은 경영자는 없다. 이런 기업으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하는 최고의 백신은 무엇일까? 사실을 털어놓으려는 직원들을 찾아 나서고, 이런 직원들을 자주 만나는 것이다.
캣멀은 실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결과 달성하는 성장의 혜택을 둘 다 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캣멀의 답은 간단합니다. 경영자가 자신의 실수, 자신이 실패에 기여한 부분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직원들이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경영자는 실패에서 도망치거나,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실패는 많은 비용을 초래합니다. 좋은 제품을 만들지 못하거나 대중적 역풍에 휘말리면 기업의 평판과 직원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픽사 경영진은 실패 비용을 제한하는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작품을 두고 감독들이 몇 년간 구상 단계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도하고 탐구하는 것이 이후 단계에서 실패하는 것보다 차라리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업이 실패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업에서 오류가 발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문제가 더 진행되지 않도록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직원들이 모여 함께 논의하는 대신, 일을 멈추고 남에게 알리지 않은 채 문제를 방치하는가?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가? 만약 그렇다면, 해당 기업은 실패를 죄악시하는 기업이다. 굳이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으려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실패는 그 자체로 충분히 힘든 일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994년 개봉한 <라이온 킹>이 세계적으로 9억 5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을 정점으로,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즈니의 쇠퇴기는 2010년까지 16년간 계속되었고, 해당 기간에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캣멀은 이것이 디즈니 임직원들이 자신의 임무를 조직을 먹여 살리는 것으로 착각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기업이 작업 과정의 효율성과 일관성만 추구하다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호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기업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고, 설령 나와도 기각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각 조직은 나름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데 수많은 조직이 제품의 품질에 책임을 지지 않고, 제품의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부여받은 업무만 합니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을 균형 있게 갖추어야 합니다. 조직을 먹여 살리는 일과 직원들의 창의성을 보호하는 일에 균형 있게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는 기업은 한쪽에 편향됐을 때보다 더 강해집니다. 불건전한 기업문화에서 직원들은 다른 사람의 목표는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를 관철시켜야만 회사가 잘될 것이라고 믿는 반면, 건전한 기업문화에서는 직원들이 자신의 목표와 다른 직원의 목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직원들은 보석을 손에 꼭 쥐고 애지중지하며 닦듯,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작품을 만든다. 경영자가 이런 행동을 허용하는 것은 보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직원들이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게 보호해야 하는 경영자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듯, 일부 직원들은 엉뚱하게도 보석이 아닌 벽돌을 열심히 닦으려고 한다.
픽사는 조직 구성원들의 생각을 집단지성으로 모으고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데요.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시도를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장 답사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현장 답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와 달리 픽사의 제작팀은 현장 답사를 중시하여 더 실감 나는 화면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리사가 되길 꿈꾸는 파리 생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라따뚜이> 제작에 착수했을 때, 제작팀은 캣멀의 강력한 권유로 프랑스에서 2주간 머물면서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레스토랑들을 방문해 주방을 견학하고 요리사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당시 제작팀은 쥐들이 사는 파리 하수구도 직접 방문했죠. 뿐만 아니라 <업>을 제작할 때는 베네수엘라 산으로, <니모를 찾아서>를 제작할 때에는 샌프란시스코 하수도 처리장으로, <몬스터 대학교>를 개봉하기 전에는 여러 명문 대학교로 답사를 다니며 픽사는 애니메이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글로벌 콘텐츠 기업인 디즈니를 설립한 월트 디즈니는 당대에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을 이해하고 최신 기술을 적극 활용하며 애니메이션 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픽사도 이러한 장점을 알고 있었는데요, 실제로 픽사는 처음부터 기술, 예술, 비즈니스를 아우르는 경영진의 지휘 아래 성장해왔습니다. 캣멀은 기술 부문을, 존 래스터는 창작 부문을, 스티브 잡스는 비즈니스 부문을 총괄했습니다.
픽사의 창작 부문을 맡은 존 래스터가 즐겨 쓰던 표현을 보면 픽사가 얼마나 기술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아마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던 분들이라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단편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것을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픽사는 이처럼 단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시험하고, 제작자의 역량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술 혁신을 이룬 단편 작품은 없었고, 장편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경험을 쌓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픽사는 이러한 실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요. 단편 애니메이션에는 예상치 못한 다른 혜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혜택은 한 사람이 더 폭넓은 업무를 소화해서 다양한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장편 애니메이션에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 범위 외의 작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단편 애니메이션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다른 분야의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픽사는 수익성이 없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내부적으로 경영진이 예술성을 중요시한다는 메시지를 제작진에게 전달하여 픽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픽사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실험하거나, 외부적으로 관객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의 효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후 분석 회의가 도움이 된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후 분석 회의를 두려워합니다. 이미 다 끝났기 때문에 축하만 하고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캣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사후 분석 회의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통합 정리할 수 있다.
2. 현장에 없던 사람들에게 학습 기회를 제공한다
3. 감정의 앙금이 상처로 곪는 것을 예방한다
4. 직원들이 함께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5. 향후 프로젝트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캣멀은 이러한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회의 방식을 다변화하며 공포를 누구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회의의 모든 참석자에게 다음 프로젝트에서 다시 하고 싶은 일 다섯 가지, 하고 싶지 않은 일 다섯 가지를 작성해오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창의성을 유지하며 작품을 만들어온 픽사는 2006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 74억 달러로 매각되었습니다. 매각을 결정하기까지 캣멀은 밥 아이거(당시 디즈니 대표)와 수차례 만남을 갖고 고민하며 핵심가치가 파괴되지 않도록 여러 조건을 요구했죠. 그렇게 합병이 결정되자 스티브 잡스는 캣멀과 존 래스터를 끌어안고 자부심과 안도감, 애정이 담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경영진과 함께 픽사를 파산 위기의 하드웨어 판매 회사에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을 뿐 아니라, 픽사가 계속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마침내 제공한 것입니다. 디즈니라는 소중한 협력사와 밥 아이거라는 진실한 후원자를 말입니다.
이후 캣멀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같이 담당하며 두 회사가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한 캣멀과 수많은 임직원의 노력 덕분에 오늘도 두 회사는 우리에게 멋진 애니메이션을 선사하고 있는데요. 픽사와 디즈니가 앞으로도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