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의 역사와 시사점 (1)
여러분은 '픽사(PIXAR)'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우선 픽사가 제작한 <토이 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인크레더블>, <업>, <인사이드 아웃> 등 수많은 인기 애니메이션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모든 픽사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마스코트 램프 스탠드를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램프 캐릭터의 이름은 룩소 주니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제작해온 픽사가 예전에는 하드웨어 회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하드웨어 기업이던 픽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시사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픽사의 역사: 컴퓨터 회사에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2. 픽사의 문화: 픽사는 어떻게 창의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 콘텐츠 본문은 에드 캣멀의 저서 <창의성을 지휘하라>를 참조하였습니다
픽사의 창립자인 에드 캣멀은 미국 유타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캣멀은 월트 디즈니가 출연하여 애니메이션 기법에 대해 설명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애니메이터의 꿈을 키웠습니다. 실제로 캣멀은 미술 시간에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력이 좋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할 만큼 실력 있는 애니메이터가 될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 캣멀은 막막한 애니메이터의 길 대신 조금 더 길이 명확해 보이는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과학자의 길에 들어선 캣멀은 1969년 물리학 학위와 컴퓨터공학 학위를 받으며 유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을 밟았는데 당시 대학원 교수와 학장은 학생들에게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작업할 공간과 컴퓨터를 제공한 뒤, 컴퓨터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유타대학 컴퓨터공학과에는 상호 협조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고, 캣멀은 훗날 픽사에서 이런 조직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대학 시절 자신이 가장 많은 영감을 얻은 원천은 바로 학우들이라고 말하는데요. 실제로 그의 학우 중에는 실리콘그래픽스와 넷스케이프를 창업한 짐 클라크,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선구자로 알려진 앨런 케이, 어도비를 공동 설립한 존 워녹 등이 있습니다.
캣멀은 공학을 공부하면서도 애니메이션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컴퓨터공학과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접한 그는 연필 대신 컴퓨터로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캣멀은 대학원 시절 동안 기술을 활용하여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뛰어난 학우들과 함께 연구를 하는 등 꿈을 향한 노력을 이어나갔고, 1974년 유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캣멀은 픽사를 경영하기까지 세 명의 각기 다른 스타일의 혁신적인 상사를 거쳤다고 말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영하는 법을 훈련받으며, 좋은 경영자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그의 첫 상사는 바로 성공한 기업가로서 1955년 뉴욕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총장을 역임한 알렉스 슈어입니다.
당시 대학원을 마친 에드 캣멀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녔습니다. 캣멀은 컴퓨터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회사와 기관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없고 컴퓨터그래픽 학자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던 1974년 어느 날 캣멀은 뜬금없이 알렉스 슈어의 직원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직원은 평소 컴퓨터 기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던 알렉스 슈어가 애니메이션 제작과 컴퓨터 기술을 접목하는 연구를 위해 뉴욕 시에 컴퓨터그래픽 연구소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몇 주 후, 캣멀은 뉴욕공과대학 컴퓨터그래픽 연구소 소장이 되었습니다. 알렉스 슈어는 캣멀에게 팀을 조직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슈어는 자신이 채용한 사람들을 완전히 신뢰했고, 캣멀은 슈어의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스스로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캣멀은 '앨비 레이 스미스'를 첫 직원으로 채용했습니다. 그는 뉴욕 대학과 UC버클리에서 강의를 하고,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서 연구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캣멀이 보기에 앨비는 자신보다 더 연구소장에 적합해 보였습니다. 캣멀은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앨비를 채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원 시절과 같은 좋은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비록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제나 더 나은 인재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앨비 레이 스미스는 캣멀과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가 되었습니다.
캣멀은 컴퓨터그래픽 연구소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했지만, 정작 연구소에는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스토리텔러가 없었습니다. 제작자를 찾기 위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연락했지만 스튜디오들은 캣멀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영화 제작에 컴퓨터 기술을 접목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77년 5월 25일 한 남자가 <스타워즈>라는 영화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그는 바로 갓 32살이 된 감독 겸 각본가 조지 루카스였습니다. 이후 루카스는 애니메이션에 활용할 컴퓨터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그래픽스 그룹'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그룹의 리더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캣멀 역시 그래픽스 그룹의 리더를 뽑기 위한 면접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면접에서 '이 업계에서 당신 외에 이 직책의 적임자로 누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컴퓨터 기술 분야에서 인상적인 업적을 쌓고 있다고 생각한 여러 사람의 이름을 주저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급한 사람들은 이미 면접 과정을 거쳤고,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자신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면접에서 경쟁자들의 이름을 얘기하지 않는 행동은 경쟁심의 발로일 뿐 아니라 자신감 부족의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캣멀이 루카스필름 그래픽스 그룹의 리더로 채용되었습니다.
디지털 영상 기법을 개발하기 전, 루카스필름은 정교한 광학 장치를 사용해 수작업으로 특수효과를 만들어냈습니다. 특수효과팀은 이런 수고스러운 방식에 안주하려고 했고, 캣멀의 팀은 이들이 디지털 영상 기법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했습니다. 캣멀은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앨비를 데려왔는데, 그들과 팀원들은 필름을 스캔하고 실사 이미지와 특수효과 이미지를 합성해 결과물을 녹화하는 일에 특화된 컴퓨터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완성까지는 4년 정도가 걸렸는데, 그들은 해당 컴퓨터를 '픽사 이미지 컴퓨터'라고 명명했습니다.
'픽사'라는 이름은 앨비 레이 스미스와 로렌 카펜터라는 동료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텍사스 주와 뉴멕시코 주에서 자란 앨비는 스페인어에 친숙했고, '레이저(laser)' 같은 일부 영어 명사가 스페인어 동사처럼 보이는 현상을 흥미로워했습니다. (스페인어 동사는 대체로 -ar, -ir, -er로 끝난다고 합니다) 그는 '그림들을 제작하다 (to make pictures)'라는 의미를 담은 가상의 스페인어 동사 '픽서(pixer)를 만들어내 새로운 컴퓨터의 이름으로 추천했습니다. 한편 로렌 카펜터는 '레이더(radar)'라는 이름이 더 하이테크적인 느낌이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를 합쳐 '픽사(pixar)'라는 이름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현장에서 시험할 때 편집자들은 참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캣멀은 이 경험을 통해서 혁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혁신의 결과로 나온 도구를 사용할 사람들의 동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경영자들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그 아이디어를 도입해 실제로 일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느낀 것입니다.
1983년 조지 루카스는 이혼을 했고, 그는 이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부 사업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금 압박을 받자 조지 루카스는 그래픽스 그룹을 매각하기로 결심했고, GM이나 필립스와 인수 계약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래픽스 그룹의 주요 자산은 픽사이미지컴퓨터 사업이었습니다. 픽사이미지컴퓨터는 실사영화의 프레임을 처리하기 위해 설계됐지만, 영상 작업이 필요한 디자인업체, 의료기관, 정부기관에서 다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GM은 이러한 기술을 자동차 산업에 활용하고, 필립스는 의료 정보 처리에 활용할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GM, 필립스와의 계약이 무산된 덕분에 캣멀은 1985년 2월에 스티브 잡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애플의 수석 연구원으로 일하던 대학 동기 앨런 케이가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관심이 있으면 그래픽스 그룹과 만나보라고 주선해준 것입니다. 이후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고 '넥스트'라는 회사를 창업하며 한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1986년 스티브 잡스는 루카스 필름의 그래픽스 그룹을 인수해 픽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추가로 500만 달러를 투자해 픽사 지분 70%는 자신이 소유하고 30%는 픽사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스티브 잡스가 생각한 픽사의 수익 모델은 전문가용 최첨단 컴퓨터인 픽사이미지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픽사의 직원들은 하드웨어를 판매해본 적이 없었고, 전문가용 컴퓨터 시장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픽사가 한창 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최악의 시점에 잡스가 픽사에 투자한 개인자금은 무려 54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잡스의 순자산을 감안하면 이는 무척 부담스러운 액수였습니다.
결국 픽사는 처음부터 가장 하고 싶던 일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픽사의 모든 직원들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분야였고, 이제 남은 선택은 픽사가 가진 모든 것을 이 목표에 쏟는 것뿐이었습니다.
픽사가 아직 루카스필름 그래픽스 그룹이던 당시, 그래픽스 그룹은 기술을 체험할 수 있는 방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캣멀은 존 래스터라는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만났는데 그는 캣멀이 하는 일에 가장 관심을 보였고 둘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존은 버림받은 토스터, 담요, 램프, 라디오, 진공청소기가 주인을 찾기 위해 숲 속 오두막집에서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용감한 토스터의 모험 The Brave Little Toaster>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존이 디즈니에 입사하던 때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침체기였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1961년 <101마리 달마시안> 이후 눈에 띄는 기술적 진보를 보이지 못했고, 상당수의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문화에 실망해 디즈니를 떠났습니다. 실제로 픽사 방문 이후 존은 회사에 돌아가서 스토리를 다듬고 애니메이션을 제안했으나, 디즈니의 상사는 존의 제안을 듣고 즉시 그를 해고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캣멀은 루카스필름에서 첫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보자고 제안했고, 존은 즉시 캣멀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픽사가 전력을 쏟기로 결정한 1991년, 픽사는 디즈니와 장편 컴퓨터 애니메이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디즈니가 제작비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배급과 마케팅을 맡는 대신 판권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작품 콘셉트는 존 래스터가 구상해놓은 상태였는데, 그가 구상한 작품은 장난감을 사랑하는 앤디라는 소년과 장난감들의 이야기를 그린 <토이 스토리>였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5년 픽사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가 개봉했습니다. 토이 스토리는 세계적으로 3억 58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1995년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린 영화에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픽사는 개봉 약 1주일 뒤 상장을 통해 1억 4000만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확보했는데, 이는 1995년에 실시된 기업 공개 중 최고 기록입니다.
픽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픽사는 첫 작품부터 흥행에 성공한 기업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캣멀은 <토이 스토리>를 성공시키기까지 약 20년간 노력해왔는데요. 정작 캣멀은 그렇게 바라던 첫 성공을 거둔 이후에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의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노력한 끝에 결국 달성한 게 이것이 전부인가? 다른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20년간 기차와 선로를 만들었는데, 앞으로 선로를 따라 기차를 운행하는 일은 훨씬 덜 흥미로운 일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결국 캣멀은 1년의 고민 끝에 새로운 목표를 찾았습니다. 바로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인데요. 다음 콘텐츠에서는 캣멀이 어떻게 픽사의 정체성과 문화를 만들어나갔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