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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Dec 06. 2021

해치지 않아요

당신도 나도, 우리는 다들 같은 사람인 걸요

광화문 교보빌딩에 걸렸던 문구.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교보빌딩 문구의 글값이라 생각하고 교보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샀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까지.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Kodak colorplus 200 film

2021년 7월





 지난여름, 광화문 광장을 걷던 어느 날. 름 한 점 없는 뙤약볕이 따가운 날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지 불과 5분이나 지났을까. 그새 얼굴 목덜미 줄줄 러내린 땀을 닦았다. 그다지 소용은 없었지만 손부채를 부쳐가며 고개를 들었다. 뜨겁 반짝이 여름 햇빛 탓에 눈을 다 뜨지는 못했다. 절반은 감고 절반은 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는데, 그때 눈에 들어오던 문구 하나.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광화문 교보빌딩 건물 외벽에 내걸린 글귀였다. 김경인 시인의 <여름의 할 일>이라는 시에서 가져온 구절. 그걸 읽고 나니 한껏 찌푸렸던 얼굴에 나도 모르게 가벼운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지금은 어떤 따뜻한 문장이 자리 잡고 있을까, 하고. 나뿐만은 아닐 거다. 고작 글 한 줄이지만, 바삐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에게 잠깐 동안의 다정한 볕 한 줌은 되어주지 않았을까. 과연. 광장 건널목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두웠던 얼굴이 조금은 환해진 것처럼 보였다. 교보생명에서는 1991년부터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대형 글판을 걸었다고 하니, 물경 30년째 계속서 따뜻함을 나누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글판의 문장처럼 나는 올해 여름 모르는 이의 그늘을 읽은 적이 있었나. 읽고서 그 그늘을 옅어지게 하려  적은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없었다. 최근에는 더욱 그랬다. 변명을 하자면, 휴직을 하고 대부분의 날은 아이와 함께 집에만 있었던지라 누군가를 만날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짧은 동안이지만 집 근처를 오가며 얼핏 쳐 지나간 적은 있었던 듯하다. 그때가 아마. 광화문을 걸었던 날에서 불과 며칠 전. 여름 온도가 제 한계라고는 모르는 운동선수처럼 매일같이 록을 경신하고, 이에 따라 짜증과 불쾌감도 끝간 데 없이 차오르던 무렵의 이었다.


 여느 때처럼 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심심찮게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바깥에는 열대야라는 침략군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의 수가 제법 됐다. 걸으면서 다들 동병상련을 느꼈을 게다. 잠시 동안의 피난을 마치고 홍제천에서 아파트 단지 초입으로 들어섰다. 맞은편에서는 네댓 명 정도,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꽤나 키가 큰 아들, 아직 꼬마 아이인 딸, 그리고 삼촌인지 누구인지 모를 남자도 한 명 더. 조곤조곤, 때로는 왁자지껄, 가끔 다 같이 크게 웃기도 하고. 아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팔다리를 크게 휘저었다.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얼핏 봐도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이었다.


 그네들 곁을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던 중. 행복감에 취해 주변을 살피는 데 소홀했던 걸까.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버지 흠칫 놀라는 얼굴이었다. 동시에 키가 큰 들을 서둘러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들이 내 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어깨동무하 것처럼 팔을 단단히 둘렀다. 혹은 내가 아들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도 보였다. 입을 꾹 닫고 얼른 내가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기색. 갑작스러운 무거운 침묵이 나와 그들을 짓눌렀다. 침 거리에는 우리밖에 없고 때마침 지나가는 차 한 대, 길고양이 한 마리도 없어서 유난히 적막했다. 순 나도 당황했다. 혹시 내가 갑갑증 때문에 마스크를 벗고 있나, 아닌데. 팔다리에 흉한 문신이 있거나 손에 흉한 물건이라도 들고 있나, 그것도 아닌데. 도무지 연유를 몰라했다. 


 졸지에 유해조수 따위 취급을 받게 된지라 불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바삐 놀리는데. 지나가며 아들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난 뒤에야 알았다. 지나치게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입은 많이 벌어졌고 눈동자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짐작컨대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인 듯했다. 문득 영화 <말아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가 약을 사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발달장애가 있는 주인공 초원은 얼룩말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를 만진다. 그저 얼룩말을 좋아해서인데. 영문을 모르는 여자는 놀라 소리를 지르고 남자 친구는 초원을 때린다. 돌아온 엄마는 아이가 맞는 장면을 보고 달려든다. 우리 아이 왜 때리냐며 울부짖는다. 난리통 속에서 초원은 사람들을 향해 엄마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말을 크게 외친다.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곁을 지나가며 말해주고 싶었다. 이 아이가 설마 저를 해치기라도 할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라고. 하지만 미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들은 어느새 저만치로 멀어지고 있었다. 실은 기회가 있었더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쪽에서도 낯선 이가 말을 거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을 게다. 아버지의 능숙한 움직임 사이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일련의 동작과 침묵과 경계가 빈틈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었기에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그때 분명 보았다. 장애가 있는 아들, 혹여나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까 봐,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을까 봐 끌어당기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짙은 그늘을.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영역의 그늘이었다.


 기억을 올려 보면 비슷한 그늘을 이미 몇 번 마주한 적 있다. 아이와 함께 느릿하게 아파트 단지를 걷는 오후 시간. 하교 시간과 겹칠 때가 있다. 아파트 입구에 노란색 스쿨버스들이 비상등을 켠 채 서고 뒤이어 학생들이 내린다. 평범한 이들이지만 종종 다른 모습의 아이들이 내리는 버스도 있다. 지난밤 산책길에 마주쳤던 아이와 비슷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다. 역시나 그 아이들도 천진난만한 얼굴이다. 마중 나온 엄마를 향해 두 손 두 팔을 흔들 펄쩍펄쩍 뛰며 반가움을 표한다. 역시나 그 엄마들도, 지난밤에 마주쳤던 아버지와 비슷하게,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아이를 보며 햇살 같이 활짝 웃으면서도 한쪽 구석에는 먹구름 같은 그늘을 감출 수 없다.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왠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번번이 고개를 돌린다.


 비장애인인 나는 그동안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봐 왔던가. 어렸을 적 내가 살던 곳에도 특수학교가 하나 있었다.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공립 특수교육기관. 리고 철없던 우리는 간혹 친구들 중 누군가가 바보 같은 짓을 하면 그 학교 이름을 따서 "에라이, 혜광아. 혜광이 같은 놈아."라고 놀리곤 했다. 뒤이어 바보, 백치, 천치, 빠가, 병신 같은 상스러운 단어를 붙여가면서. 지금 생각하니 참 몹쓸 짓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돌을 던져 개구리를 맞추거나, 개미떼를 발로 짓밟거나, 우리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놀리고 욕하거나 때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뒤의 잔인함이 소름 끼칠 때가 있다. 그땐 왜 그랬을까. 멋모르는 아이였을 때니까, 러면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으니까, 남들이 그래서 따라한 거니까, 라는 말로 변명할 수 없을 거다.


 그때보다 한참은 더 자랐는데도, 아직도 장애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 마주칠 때마다 머뭇거린다. 당신을 배려한다는 듯 한껏 따뜻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다. 굳은 표정으로 멀찍이로 피해 다닐까, 아니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혐오를 드러낼까, 연히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 보듯 지나쳐야 한다.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나가면서 괜히 곁눈질로 흘끗거리게 된다. 내가 이러는 건 어쩌면 함께 사는 법을 배운 적 없어서라 변명해 본다. 책에서도 TV에서도 '보통의' 우리만이 존재했다. 지 멀쩡하고 잘생기고 예쁘고 사랑과 민족과 국가를 얘기하는 이들. 장애가 있는 이들은 종종 <인간극장> 따위 방송에서나 한데 모아 볼 수 있었다. 작년 기준 장애인 수는 263만 명, 전체 인구의 5%나 됨에도 거리에서 쉬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나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숨어 있는 걸까. 함께하는 존재라는 걸 잊고 지내다 보니 바로 곁에 있는데도 눈에 띄지 않는 걸까.


 요아이의 그림책을 종종 같이 본다. 글자를 모를 아이지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어한다. 까르르 웃으면서 조그마한 손을 놀려 페이지를 넘겨댄다. 그러던 중.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성별과 인종이 다양하게 그려진 아이들이다. 가운데에는 휠체어를 탄 아이가 자리 잡고 있다. 다들 손에 손잡고 춤을 추며 즐겁게 노래를 부른다. 이런 그림을 보니.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막연한 기대를 품게 다. 지난여름 광화문 광장에서 봤던 글귀가 다시 생각났다. 어릴 적부터 이런 걸 배운 아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지금보다는,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더 잘 읽고, 그 그늘을 옅게 하려 애쓰고, 나아가 처음부터 그늘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훗날의 세상에서는 장애란, 살아가는 데 흠이 아니라 그저 몸에 난 점 같은 걸로 여겨으면.


 그림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가르쳐 본다.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 본다.


 "진아. 여기 봐봐. 피부가 하얀색, 노란색, 까만색 친구들도 있지. 가운데 파마머리 한 누나는 휠체어 타고 있네. 다들 다르게 생겼어도 친구야 친구."




하얀 아이, 노란 아이, 까만 아이, 휠체어 탄 아이까지 모두가 함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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