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 여친이자 현 아내와 연애하던 무렵.데이트 코스에는 늘 홍대 수 노래방이 빠지지 않았다.둘 다 음주가무를 좋아해서 노래방에 가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용실에서 펌할 때 쓰는 둥근 모자처럼 생긴 위생 커버를 마이크에 씌우고. 그걸 각자 손에 나눠 쥔 채 열정을 불살랐던 우리. 록, 댄스, 힙합, 발라드, 올드팝까지 장르불문. 끝 곡은으레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나 015B의 '이젠 안녕'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아쉬운 마음에 추가 시간을 요청하는 건 다반사였고, 그 시간마저 다 써버릴 때 즈음에는 목에서 쇳소리가 나고 등줄기는 땀으로 젖어있고 쉴 새 없이 탬버린을 흔들던 팔목은 시큰거렸다.
아내는 수많은 애창곡 중에서도 랩이 특출났다. 랩 중에서도 이제는 추억의 그룹이 된 원타임의 '1TYM'은 가히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했다. "알겠어 와와 우리도 지금까지 how how 너무도 긴 시간을 foul foul..." 일순간에 낮고 굵은 목소리로 변해 마이크로폰 췍 원 투, 하면서 랩을 시작하는데. 발성, 딕션, 플로우, 심지어 제스처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관객'어떤 사람 A'라도 된 양 두 팔을 위로 들고서, 그러니까 푸쳐핸섭하고서 how how, foul foul 같은 각운 구절만 따라서 합창, 그러니까 메잌 썸 노이즈하는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YG, 아니, 1998년 당시에는 '양군기획'에서 론칭한 힙합그룹 원타임의 초대 팬클럽 출신이었다는 아내. 원타임을 뜻하는 'One Time for Your Mind'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써진 하얀 수건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굿즈들도 소장했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그 시절 여중생으로 돌아간 듯 얼굴이 발그레하다.
"이야, 그럼 너도 테디처럼 머리에 수건 좀 두르고 다녔겠네."
"그러엄. 두르기도 하고 한 손으로 흔들기도 하고 두 손으로 펼쳐서 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다 헤져서 행주로도 쓰다가 어느 날엔가 사라져 버렸네."
"소싯적에 힙합전사였구만. 그때 팬클럽 활동하려면 PC 통신 파란 화면하고 뚜 뚜 모뎀 소리 좀 들으셨겠는데."
"두말하면 입 아프지. 우리집은 하이텔이었어. 너네는?"
그뿐만 아니었다. 원타임 이전에는 지누션의 팬이기도 했단다. 지누션 이전에 야심 차게 등장했지만 소리 소문 없이 망해버린, YG 최초의 그룹인 킵식스를 응원했다고도 한다. 이거 아는 사람 몇 없을 텐데. 그야말로 YG의 처음부터 함께했으니, 다소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아내는 'YG 패밀리'와 다름없었다. 어쩐지. 결혼하고 서로 살림살이를 합치면서 가져온 소장 음반들을 살펴보니 과연 원타임, 세븐, YG 패밀리 베스트 앨범뿐만 아니라 한국 힙합의 큰 형님이라 할 수 있는 D.O. 이현도의 CD까지 있더라니. 옛날 가요 앨범들을 정리하면서 예전 한 시절의 추억담을 꺼내 펼쳤다.
"너도 혹시 힙합바지 같은 거 입고 다녔니? 바지 통이 엄청 큰 배드보이나 타미 힐피거 같은 거."
"오오, 기억난다. 맞아 맞아. 나는 타미 바지, 신발에 압정 꽂아서 다녔어."
"너는 압정파였구만. 나는 짝퉁 배드보이를 고무링으로 묶어서 다녔는데."
아내는 압정파, 나는 고무링파였다. 힙합바지는 워낙에 통이 넓고 길이가 긴 지라 바짓단을 묶어서 핀으로 고정하거나 고무줄로 묶고 다녀야했다. 그럼에도 결국 삐져나온 끝단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곤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때 환경미화부 아저씨들에게 우리가 조금은 도움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여하튼 한때 힙합전사였던 나와 아내에게, 그리고 90년대 추억의 힙합 문화에, 리스펙트.
2. 나도 한때 힙합을 나름 열심히 들었다. 아내처럼 소위 오버그라운드 힙합도 좋아했지만 마스터플랜(MP)을 비롯한 언더 씬의 힙합도 즐겨 들었다. '모던 라임'의 혁명가 버벌진트, '정상을 향한 독주'를 하던 주석, CB Mass로 뜨기 전의 개코와 최자, 아직까지 배고프고 사나웠던 데프콘까지. 그때만 하더라도, 왠지 오버 힙합을 듣는 건부끄러운 일이었다. 원타임이나 지누션을 좋아한다 그러면 없어 보일까 봐 일부러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언더 뮤지션들의 이름을 줄줄 외곤 했다.요즈음의 소위 홍대병 비슷한 걸 일찍이 앓았던 것.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세기말 1999년은 '진짜' 힙합이 등장했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며 미국 본토 힙합을 선보였던 드렁큰타이거가 출현했고, PC 통신에서는 힙합 동호회 SNP와 블렉스가 활발히 활동했으며, <1999 대한민국> 같은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이 속속 발매됐다. 기라성 같은 래퍼들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전까지 랩 음악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해를 일러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 힙합의 원년'이라고까지 할 수 있으려나. 새 천년은 새로운 음악과 함께 열리는군, 이라며 자못 음악평론가 같은 감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마침내 2000년. 0과1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컴퓨터 때문에 세상이 멸망한다던 Y2K의 공포는 한낱 소동극에 불과했다.고교생이 된 나는 여전히 힙합을 들었다. 언더 힙합의 성지로 불렸던 홍대 마스터플랜도 궁금했지만 서울 사람이 아닌 탓에 직접 가 보진 못했다. 대신 주석, 가리온, Side B, MC성천 등MP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한 <MP Hip Hop Project 2000 超> 앨범은 무던히도 들었다. 듣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앨범의 두 번째 트랙 'Get Down'이라는 단체곡으로 학교 축제 오디션에도 나갔다. 고1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J가 힙합 광팬이었는데 나를 비롯한 친구 4명을 꾀어서 오디션에 참가했던 것. 우리 다섯이야말로 밀레니엄의 첫 무대를 씹어 삼킬 힙합 전사지. 그런 비장한 눈빛으로 준비한 MR에 맞춰 랩을 했지만 채 1절도 다 못 부르고 땡. 심사위원인 음악 선생님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만, 이라고 외쳤다. 탈락이었다. 내 파트는 2절에 있었던지라숨겨왔던 비장의 랩 실력을 선보이지도 못했다. "겟 다운 겟 다운."거리는단체 후렴 부분만 열나게 외치다가 난데없이 무대의 끝을 맞이했던 것. 상심한 채로 오디션장을 나가면서 J에게 툴툴거렸다.
"에이 씨, 이게 뭐야. 아무도 모르는 이런 노래 말고 god 노래나 하자니까 괜히 이딴 거 불러 가지고."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 힙합에 대한 열정이 다소 사그라들었다.
오디션 탈락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나와 달리 J는 꾸준하게 힙합에 천착했다. 우리 학교 최초의 힙합동아리를 만들었고, 초보 티가 풀풀 나는 조악한 비트에다 가사를 얹은 자작곡을 쓰기도 했다.'대도시' 부산까지 가서 당시 지누션의 션이 론칭한 힙합 패션 브랜드 'Majah Flavah (MF!)'의 옷을 한 아름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거 꽤나 비싼 옷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녀석은 제법 있는 집 자식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흑인 음악 동아리를 하더니만 나중에는 동아리연합회 회장 자리에까지 앉았다. 힙합 인생 외길의 나름 결실을 맺은 셈. 이것 참, 맹자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 아닌가. "하고자 하는 자는 우물 파는 것과 같다."고. 어떤 것을 행한다는 건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며, 우물을 아홉 길을 팠어도 샘에 닿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물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J는 꾸준히 파고 파다 마침내 나름의 샘에 도달했다.
3. 2010년대가되자, 자연스레 아내도 나도 엠넷의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애청자가 됐다. 한동안 듣지 않았던 힙합씬에 이렇게나 다양하고, 우리가 몰랐던 래퍼들이 활동하고 있었구나. 다시금 힙합에 대한 애정이 피어올랐다. 이현도와 가리온, 더블케이 같은 몇몇 1세대 래퍼들도 여전히 건재했고, 바비와 송민호 같은 아이돌 출신 래퍼들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예전의 다이나믹듀오, 버벌진트 등 새파란 신인들은 이제는 씬의 중견들이 됐다. 오랜만이었지만 힙합을 보고 듣는 재미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애청자 역할은 시즌 4인가 5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시즌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 해가 갈수록 소위 '힙찔이'들이 늘어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칭 스웩이라면서 건들거리며 돈 자랑, 차 자랑, 여자 자랑, 하다 못해 잘나고 잘나신 나 자랑까지 일색인 가사들을 죄다 비슷하게 읊어대는 꼴이 지겨워졌다.화수분도 아니고 어디서 저런 망나니 같은 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걸까. 그리고 오디션 프로그램의 숙명과도 같은 익숙한 지루함도 있었다. 같은 서바이벌 포맷의, 게다가 같은 장르만을 취급하는 오디션이 매년 이어지다 보면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느껴질 터. 그렇게나 인기 있던 <슈퍼스타 K>도마지막 시즌 우승자는 누구였는지도 기억 안 나는데 <쇼미더머니>라고 그 꼴이 나지 않을 거란 법은 없다.
그러고 보면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 제목 자체가 힙합에 대해 굉장히 모욕적이기도 하다. 오로지 돈과 성공만이 힙합의 목표였던가, 그런 것들이 음악의 목적이었던가. 다시금 생각한다. 예전에는 속물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음악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까 봐 '돈' 이야기는 부러 꺼렸었다. 물론 먹고살기 위해서는 노래를 부르고서 돈을 받고, 밥을 먹고, 세금을 내고, 공과금도 납부하고, 정산을 따지고, 계약서를 쓰고, 문제가 생기면 법적 싸움을 하고, 했을 거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더라도 음악에서만큼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랑, 평화, 자유, 철학을 노래했다. 그런 게 당연했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간은 예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다들 소리 높여 이렇게 외친다.
"어차피 속으로 다들 돈 생각하면서 아닌 척하는 게 더 구리잖아. 솔직해지자고. 나는 성공하려고 음악 하는데? 돈 많이 벌어서 플렉스 하는 게 목표라고. 그러니까 잘 봐, 나 보여줄 테니, 쇼 미 더 머니!"
심지어. 현재 방영 중인 시즌 10에서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래퍼 염따는 히죽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승보다 음원이 목표, 돈만 챙길 거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내가 한 말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홧홧거렸다. 이후로 그 프로그램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이게 작금의 '시대정신'이라면 단지 힙합만을 욕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다들 돈 돈 돈, 그런다니까 음악이라고 돈 돈 돈, 이러지 않을 수가 있겠나. 하지만 무언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겠다.소중히 간직해오던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만 기분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투 올드 힙합 키드가 된 기분도 든다.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버린 걸까.
4. 그리고 지금. 힙합 마니아들의 성지였던 라이브 클럽 마스터플랜은 이후 공연장을 접고 힙합 레이블로 발전했다. 하지만 외연을 확장하면서 주축이었던 힙합 아티스트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해피로봇 레코드와 자매결연을 맺으며 인디 뮤지션의 레이블처럼 변해갔다. 해피로봇에는 데이브레이크, 노리플라이, 솔루션스 등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끄덕거릴만한 인디 팀들이 다수 포진돼있다. 물론, 힙합을 하는 팀은 하나도 없다.현재는 해피로봇 레코드와 민트페이퍼, 퍼레이드 레이블을 합쳐 마스터플랜 뮤직 그룹(MPMG)이라 부르는데, 예전 힙합 레이블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게 돼버렸다. 왕년의 마스터플랜이 그랜드민트페스티벌(GMF) 같은 음악 페스티벌을 주관하고 있는 것. 아내도 나도 행사에 참여하는 여러 인디 밴드들을 좋아하고 가을이면 GMF 티켓을 끊어 찾아가기도 했으니, 억지로 갖다 붙이자면, 예전부터 이어 온 힙합에의 연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옛날에 클럽 마스터플랜은 못 가 봤지만 이제는 서울 사람이 돼서 GMF를 다녀왔으니 어쨌든 간에 가 본 걸로 치자. 거기가 거기해서 거기가 된 거기니까.우리의 추억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이렇게 우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