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릴 땐 인디아나 존스가 될 줄 알았지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Kodak colorplus 200 film
2021년 8월
오랜만에 필름 사진첩을 펼쳤다. 지난여름에 아이를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탁자에 올려둔 스탠드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한 채 조그마한 손을 뻗은 모습. 그런데 이 구도, 언젠가 봤던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런 기시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 맞다. 이건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에서 봤던 장면이다. 인디가 긴장감과 호기심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성배를 향해 손을 뻗던 그 장면.
영화에서 인디 역을 맡은 해리슨 포드는 성배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성배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됐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도 담았다는 전설의 물건. 이 잔에 담은 성수는 병과 상처를 치료하고 마시면 불로불사의 힘을 얻는단다. 이에 인디를 비롯해 독일 나치 일당까지 성배를 찾아 나서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마침내 성배가 숨겨진 장소에까지 도달한 이들.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잔이 진열돼있다. 진짜 성배는 이 중 단 하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자는 가장 화려한 잔을 성배라고 생각해 물을 담아 마셨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인디는 성배를 만든 이가 목수였다는 걸 기억해내고 가장 볼품없어 보이는 나무 잔을 선택한다. 과연, 정답이었다.
어렸을 땐 이런 모험 이야기에 매료됐다. 인디아나 존스를 비롯해서 80일간의 세계일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돈 키호테 같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고 훗날을 꿈꿨다. 그랬던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엊그제 배달 어플로 저녁을 주문하던 때였다. 아내와 일순 고민했다. 뭘 먹을까. 고민할 게 있나. 늘 먹던 걸로 시켜야지. 이번에도 역시나 단골집인 양꼬치집에서 양꼬치 2인분과 옥수수면을 주문했다. 그곳 아니면 또 다른 단골집인 순대볶음, 제육쌈밥, 중국집까지. 매번 봤던 이름들을 마주하길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최근 주문 목록을 한참 바라보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뗐다. 왠지 잘못하는 것 같아서 아내에게 말했다.
"뭐 좀 새로운 거 먹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긴 한데 위험해서 못하겠어. 기왕 먹는 한 끼를 망치기는 싫어."
“그렇기는 하다. 괜히 새로운 데 도전했다가 돈만 쓰고, 입만 버리고, 시간 날리고.”
아내 말이 맞긴 하다.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모름지기 최소 효용으로 최대 효용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어쩐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음식 주문하는 것뿐인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다니. 성공의 기쁨보다 실패의 아픔을 더 걱정한다. 우리 모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보였다.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해 본다. 회사에서 일하느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를 돌보느라 몸이 지친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늦은 밤이라 모험을 꿈꿀 시간이 없다. 아파트 대출 원리금도 갚아야 한다. 매달 백 수십만 원의 돈을 갚고 생활비를 쓰고 나면 쥐꼬리만큼 남는다. 고물가와 고금리가 일상이 된 지금은 쥐꼬리도 아니고 쥐 발톱 정도 남는다. 섣불리 어딘가에 투자하기 어렵다. 코로나 19는 지난 수년 간 우리 삶을 옥죄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작은 일조차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안의 무언가를 덜어내고 나니, 늘 같은 메뉴만 먹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모험과 도전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늘 생각만 할 뿐이다. 안락한 소파에서 떠나지 못하고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만 한다. 이런 모습은 이른바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만 유독 겁이 많아서 이러고 사는 중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