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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11. 2022

뺨을 얻어맞다

고작 그런 걸로 이런 일을 당한다

 주성치 영화를 좋아한다. 개중에서도 <파괴지왕>은 주성치 베스트를 논할 때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배달일을 하는 주성치는 착하지만 어리숙한 청년이다. 어느 날 그는 종려제의 갑작스러운 키스를 받고 그녀에게 반한다. 기실 그녀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유도부 주장을 떼내려고 옆에 있던 아무에게 입을 맞췄던 것. 유도 모 채 주성치는 그녀에게 정성 어린 구애를 하고 마침내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질투심에 사로잡힌 유도부 주장이 갑자기 나타나주먹을 휘두른다. 겁에 질린 주성치는 이를 피하고 뒤에 있던 종려제가 봉변을 당하고 만다. 퉁퉁 부은 얼굴로 겁쟁이 따위는 싫다고 그를 밀쳐내는 그녀. 소에 그녀는 체육관 락커 문에 터미네이터 사진을 붙여둘 만큼 강한 남자를 동경하던 터였다.


 시작도 못하고서 차인 는 실의에 빠다. 강해지기 위해 내내 고민하다, 자칭 중국고권법의 계승자라 주장하는 매점 주인 오맹달에게 무술을 배운다. 그러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돈만 뜯기던 끝에 고작 하나 배운 거라고는 '무적풍화륜'이라는 무술.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상대방의 몸에 들러붙어 몸을 둥글게 만 뒤 함께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말도 안 되는 기술이다. 술 사용 시  가지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 구를 때 나는 안쪽에, 상대방은 바깥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래야 바깥의 상대가 계단이며 바닥에 몸을 찧고 부딪치고 마침내 쓰러지게 된다는 거다. 상대를 방패로 삼는 셈. 우여곡절 끝에 주성치는 유도부 주장, 그보다 더 강한 가라테 주장까지 이 기술로 쓰러뜨리고 사랑을 쟁취한다.


 코흘리개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틀어주던 이 영화를 봤다. 주성치의 개그 코드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나는 호의 편에 선 사람이었다. 그냥 호도 아니고 극호. 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둘 다 넋을 잃고 TV 화면만 바라봤더랬다. 그날 밤부터 우리 형제의 활극이 시작됐다. 거실에다 두꺼운 겨울 이불을 깔아놓고 그 위를 시도 때도 없이 굴렀다. 집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무적풍화륜!"을 외치면서. 영화에서처럼 동생과 팔다리를 붙잡고 함께 구르기도 하고 혼자서 구르기도 했다. 앞구르기로도, 뒷구르기로도, 옆구르기로도, 두 번 세 번 연속 구르기까지. 어쩌다가 이불 밖으로까지 굴러가서 바닥에 머리를 찧고 아파 울기도 했다. 그전에는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구를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역시 뭐든지 직접 해 봐야 아는 법이다.


 오래된 기억 속의 한 장면었다. 그때 선연하게 른 이유는 다시금 매일 밤 비슷한 모습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육아 현장에서 나와 아내의 업무는 나름 렷하게 분장돼 있다. 이를테면 식사와 간식 준비, 빨래 개기,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기는 아내가. 밥 먹이기, 목욕시키기, 잠재우기는 내가. 나머지 책 읽어주기와 기저귀 갈기 등은 공동으로 하는 식이다. 여느 때처럼 밤 10시 즈음해서 아이는 칭얼거렸다. 두 손을 흔들며 쪽쪽이를 찾았다. 이제 밤잠에 들 시간인 것. 재우기는 내 담당이라 쪽쪽이를 물린 아이와 함께 침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금 전 보냈던 신호와는 달리 아이는 금방 잠에 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뒹굴거린다. 여기로 왔다 저기로 갔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그야말로 무적풍화륜의 모과 다를 바 없다. 대체 언제 잠이 드는 걸까. 기약 없는 기다림 마주해야 한다.


 그런 난리통 끝에 사고가 벌어지는 때가 있다. 정신없이 뒹굴던 아이가 손으로 내 뺨을 짝, 하고 때리는 순간이다. 어이쿠, 이게 대체 머선 일이구. 아이 옆에서 이보다 더 편안할 수 없는 와불의 자세 누워있던 내겐 갑작스러운 봉변다. 얼얼한 뺨을 부여잡은 채 아이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진아! 이러면 안 돼. 사람 때리는 건 나쁜 짓이야." 론, 아빠에게 해를 입히고자 일부러 한 짓은 아닐 테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다. 일부러라도, 실수라도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일순 아이는 놀라서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거린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모르는 천진 얼굴 바뀐다. 까르르, 하고 한없이 가벼운 웃음소리 내뱉는다. 훈계하느라 굳어진 내 얼굴도 이내 사르르 풀려 함께 웃고 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낼  웃어 버리 아무 과가 없을 텐데.


 비단 아이에게만 뺨을  건 아니다. 이도 유전되는 걸까. 아이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아내, 부연하자면 아내가 아직 여자 친구이던 무렵. 그녀 역시 내 뺨을 때린 적 있다. 사람들로 붐비던 한낮의 대학로. 살은 따뜻하고 미풍이 살랑이던 봄날. 다들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싸우고 있었다. 쌍시옷과 들어간 단어들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를 참지 못한 여자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짝. 한 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 대 더 때렸다. 짝. 잔인하게도 때린 쪽을 또. 그땐 우리 둘 다 마음속에 모난 돌멩이를 하나씩 갖고 있던 때. 뾰족한 모서리로 서로를 찌르고 격렬하게 부딪쳐 불꽃이 튀는 날이 일상이었다. 정작 웠는지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브라운아이드걸스를 좋아한다, 그러지 마라 따위의 문제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한 번 더 있다. 등학생 시절이었다. 우리 학교는 지방에 있는 것치곤 학생들을 서울대에 많이 보내기로 유명했다. 세어보면 매년 열댓 명 정도나 됐다. 그만큼 많이 때리기로도 유명했다. 선생들은 저마다 각목이나 회초리, 혹은 커스터마이징한 희한한 도구를 들고 다니면서 때렸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맞았고 맞은 곳을 쓱 문지르며 그러려니 했다. 폭력이 만연한 곳이어서일까. 친구들끼리도 곧잘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때는 음악 시간 전 쉬는 시간, 장소는 음악실 옆 매점. 나는 K와 옥신각신 중이었다.  원짜리 설탕 꽈배기를 손에 쥔 채. "야, 한 입만." "싫다, 마. 내 묵기도 모자란다이." "아, X나 치사하네. 쫌만 도라." 그러다 갑자기 짝, 하고 뺨따귀가 따끔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꽈배기는 중요하지 않다. 둘이 엉겨 붙어 싸움이 시작되고, 주변 친구들은 말리고, 구경꾼들이 몰려든다. 들리는 소식으로 그 친구는 졸업 후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매진했단다. 마침내 시험에 붙어서 국민께 친절과 봉사를 다하는 공무원이 되었다나. 사람 앞일은 모른다더니.


 동안 뺨을 얻어맞은 이유들이 참으로 보잘것없다. 고작 아이의 잠투정, 브라운아이드걸스, 꽈배기 따위 때문었다. 살면서 맞았던 때가 적지는 않다. 그럼에도 뺨을 맞았던 때는 그 순간의 날씨와 장소, 상대의 손이 와닿던 감촉, 맞은 직후의 감정, 주변 사람들의 시선 등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뺨을 맞는다는 건 다른 곳을 맞는 데에 비해 별스러운 일인가 보다. 육체보다는 정신아물지 않는 흉터 남기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얼마나 더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고작 지나가다 흘겨봤다고, 나보다 더 행복해 보여서, 그날따라 술이 과했다며. 욕을 하고 빼앗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사건 사고 뉴스를 보며 차라리 뺨을 얻어맞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니 어느새 세상의 폭력에 무감해진 듯해서 마음이 선득해진다.




영화 <파괴지왕> 포스터 (출처 : DAUM 영화). 이 영화도 좋지만 실은  최고로 꼽는 주성치 영화는 서유쌍기다.
분명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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