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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30. 2021

편의점에서 만난 의문의 커플

사람들이 <사랑과 전쟁>을 봤던 이유

 거의 매일 밤 홍제천 산책을 한다. 내겐 단순한 바깥나들이가 아니다. 하루 온종일의 고된 육아를 마치고, 유일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일과. 더운 여름날엔 이게 무슨 쓸데없는 고생인가 싶었다. 밖은 더웠다. 몸은 땀범벅이 되 마스크 때문에 더운 공기가 더욱 더웠다. 시간은 흘렀다. 사납던 여름 공기가 어느덧 유순해졌다. 친절하게 선선한 가을바람을 마주하게 됐다. 그런가 싶었는데. 금방 싸늘한 겨울이 됐다.

 산책이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편의점에 들르곤 한다. 맥주나 막걸리, 혹은 매화수 같은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기 위해서다. 때로는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 삼각김밥 따위를 사기도 한다. 이게 다 살로 갈 텐데. 아침밥은 제대로 챙겨 먹어야 하는데. 덧없는 걱정을 하면서도 먹을 것으로 향하는 손을 멈출 수가 없다. 아내도 나도 육아에 지쳤으니 이렇게라도 보상받아야 한다.

 그날 밤에도 귀갓길에 어김없이 편의점에 들렀다. 역시나 술을 사기 위해서였다. 우선 한 손에는 칭따오 맥주병 하나를 쥐어 들었다. 나머지 손에는 안주삼을 과자를 집으려고 했다. 과자 코너에는 웬 커플 한 쌍이 자리를 잡고 서 있어서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가 편의점에 들어가던 순간부터 그러고 있었으니 그들은 꽤 한참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마치 쌍쌍바처럼 꼭 붙어 있는 한 쌍. 여름이 진즉에 지나갔다지만 저렇게 딱 붙어 비벼대기엔 아직 더울 텐데, 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편의점 안은 좁은지라 본의 아니게, 맹세코 정말이다, 그들의 대화 일부를 듣게 됐다.

 "아이 참, 나는 평소에 편의점에 잘 안 와서 무슨 과자를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 종류가 왤케 많앙?"
 여자는 콧소리 비중이 다한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종류가 되게 많지? 나는 자주 와. 이거하고 저거하고 몇 개씩 사면 될 것 같은데. 내가 골라줄게."

 왠지 믿음 가는 중저음의 목소리. 연하처럼 보이는 남자는 여자를 이끌었다. 여자는, 작금에는 시대착오적이지만, 여자를 리드하는 남자에게 더욱 반한 . 달뜬 얼굴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남편은 편의점 같은 데 못 오게 하던데. 여기에 이런 세상이 있었네."

 그렇구나. 편의점 따위엔 못 오게 하는 우리 남편. 잠깐만. 우리 남편?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집에 도착. 현관문을 열고 마스크를 벗기도 전에 아내에게 말했다. 나 아까 편의점에서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고. 혼자만 알고 있기에 아까운 일이라서 씻기 전에 서둘러 얘기해주고팠다. 글쎄, 편의점에서 말이야. 어떤 여자가 남편이 아닌 남정네하고 딱 붙어있더라니깐.


 아내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더니 말했다. 에이, 설마. 동네에서 그렇게 대놓고 바람을 피울 리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에헤이, 네가 직접 봤으면 그런 말을 못 한다니까. 바삐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쓸데없이 토론, 아니, 토론보다는 추리에 가까운 대화를 시작했다.


 가설 1. 남자는 사실 여자의 남동생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였는데 술이 떨어져서 사러 나온 것. 아무리 간통죄도 폐지되 자유분방한 사회가 되었다 한들 자기 집 앞에서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나.

 "근데. 내가 여동생이나 누나가 없어서 잘 모르긴 한데, 아무리 봐도 그건 남매의 스킨십이 아니었다니까. 너는 처남하고 껴안을 수 있어?"

 "그렇게는 절대 못하지.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지."

 아내는 몹쓸 짓이라도 떠올린 양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가설 2. 여자는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다. 아무래도 여자 쪽 동네에서는 위험하니까 남자네 동네에 온 것. 하지만 아내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 남자도 위험부담이 있잖아?"

 "무슨 위험부담?"

 "남자 혼자 사는데 여자가 들락거린다고. 소문나지 않을까?"

 "에이. 너 우리 옆집 사람들하고 한 달에 몇 번이나 마주쳐? 한 번 될까말까잖아. 소문은 무슨."

 "마주칠 가능성이 낮은 거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아내의 말마따나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터. 굳이 누군가의 집 근처에서 만날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아파트 살이는 퍽 삭막한 구석이 있다. 옆집 부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가설 3. 집에서 남편이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니까 작금의 자유분방한 시대 현실을 고려해 보면. 남자 , 여자 하나연애 관계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성적 취향다양성이라는 게 있잖나. 어려운 말로 다자연애를 뜻하는 '폴리아모리'인가 뭐 그런 단어도 있을 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네들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다. 뭔가 이야기가 장황해지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지."

 아내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의 가설은 제시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너무 나갔구나, 싶다.


 이게 뭐라고 토록 열띤 대화를 이어. 영양가라고는 하나 없는 이야기를.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왜 TV에서  <사랑과 전쟁> 따위 프로그램을 열심히 봤는지 알겠다. 간 가는 줄 모르겠다. 여하튼. 아직도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밤의 편의점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홍제천에서 한참 걸어가면 한강 성산대교까지 갈 수 있다.
홍제천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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