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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21. 2021

옛날 팥빙수가 먹고 싶어

여름도 다 갔는데 쓰는 지난여름에 있었던 이야기

 나는 먹는 걸 그리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종종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다. 평소에 조용하던 사람이 한번 화나면 불 같이 무서운 것처럼, 먹는 데 관심 없는 사람이 먹는 것에 당기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지옥 끝까지 가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걸 고야 말겠다. 그런 불꽃같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온몸과 을 휘감는다.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영화 <분노의 질주>에 등장하는 고가의 스포츠카, 혹은 <매드 맥스>의 무장한 트럭처럼 천둥 같은 배기음을 내뿜으며 맹렬히 달려야만  때. 그러지 않으면 욕망의 불길이 모든 걸 집어삼켜 종내에는 다 타버린 까만 재만 남게 될 터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여름 더위에 지쳐있을 때. 문득 옛날 팥빙수가 먹고 싶어졌다. 여기서 '옛날'식이라 하면, 거칠고 성긴 물 얼음에다 대충 통조림 팥 몇 숟갈 넣고 역시나 통조림에서 꺼낸 후르츠 몇 조각을 뿌리고 어르신들이나 좋아하는 설탕 범벅 색색깔의 젤리를 곁들인 후 연유나 초코 시럽을 듬뿍 친, 그런 팥빙수를 말한다. 아 참. 잊지 말고 빙수 꼭대기에는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에서 꺼낸 빨간 체리를 곱게 얹어줘야 한다. 그게 화룡점정이다. 예전에 시장 좌판이나 동네 빵집 등에서 대충 만들어서 팔던 옛날 팥빙수. 게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요즈음엔 빙수들이 과하게 정성스럽다. 얼음은 으레 물이 아니라 우유를 얼려서 속이 안 보이의뭉스러운 하얀색이다. 숟가락을 갖다 대기만 해도 스르륵 녹아버릴 만큼 입자가 곱기도 하다. 팥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왠지 자연 풍광이 사진집에나 나올 법하게 아름다울 것 같은, 시골에서 올라왔고 유기농이니 협동조합이니 하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떡은 또 어찌나 말 쫀득하고 네모 반듯 정갈하게 썰어져 있는지. 이 또한 유기농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런 가운데 싸구려 통조림 과일이나 몸에 안 좋 연유며 시럽 따위는 도무지 낄 자리가 없다. 물론, 이런 빙수는 과한 정성만큼이나 가격 역시 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어딜 가더라도 요즈음의 빙수는 쉬이 찾을 수 있는데 옛날 스타일의 팥빙수는 파는 곳을 찾기 어렵다는 것. 즐겨가는 힙한 카페에는 당연히 없고, 집 근처 재래시장이나 동네 빵집에도 보이질 않고, 그렇다고 직접 얼음 가는 기계며 통조림을 사 와서 해 먹기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게 되니 그부터 옛날 팥빙수에 대한 열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나중에는, 어느 랫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미치일 듯 싸랑했던 기이억이이 추어억들이이... 죽을 만큼 먹고오오 시이잎다아아", 해졌다. 옛날 팥빙수여, 어디로 가셨나이까. 인간은 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토록 열망하는 것입니까.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러 .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다. 프랜차이즈 L 햄버거 가게에서 통조림 과일과 젤리가 들어 간 제법 예스러운 팥빙수를 판다는 것 아닌가. 사진을 보니 과연 그럴싸했다. 기억 속의 옛사랑, 아니, 옛 팥빙수와 얼추 닮았다. 그렇다면 당장 L로 달려가자, 고는 할 수 없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아이의 충복으로 전락한 나에게 한낮의 자유란 사치였다. 꼬박 한 나절을 참아내고 아이를 재운 뒤 그제야 밤 산책을 나갈 수 있었다. 집을 나와 지도 앱을 켜서 가장 가까운 L 매장을 검색, 걸어서 20여분 거리의 명지대점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열대야에 땀을 줄줄 흘리며 마침내 도착한 그곳. 잠시 매장 안의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려 온 팥빙수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패스트푸드점은 역시 이름 그대로 신속함이 핵심. 그릇을 들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듯한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는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쥔 손이 흥분과 설렘으로 떨려온다. 지금 여기, 한 그릇 옛날 팥빙수를 피우기 위해 간밤에 여름 매미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상을 보니 왠지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공연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마침내 한 숟갈. 빙수 위에 얹어진 아이스크림과 얼음 알갱이와 팥까지 골고루 퍼서 크게 한 입 었다. 느닷없이 입 속으로 들이닥친 얼음 조각들의 냉기에 일순 뒷골이 뻐근하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씹다 삼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했어야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에이, X발."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L은 L이다. 그렇다. 이놈들은 새우버거라고  놓고선 실은 새우살 함유량이 절반도 안 되는 명태살버거 따위를 팔던 거짓말쟁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엄한 L을 욕할 게 아니다. 인터넷에서 스쳐간 출처 불명의 사진 하나만 믿고서 한여름밤의 더위를 헤치며 이곳까지 온 내가 바보지. 역시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은 B가 최고다. 연유를 묻는다면 이름을 보면 알 것이다. 이름부터 이미 '왕'이 들어가 있잖나. '리아'나 '도널드', '터치' 따위를 압도하는 웅장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토록 먹고픈 옛날 팥빙수를 만나지 못해 머리가 다소 이상해져 버린 사람의 말이다. 그냥 무시하시면 된다.




즐겨가는 홍제천변 카페에서 파는 고운 '요즘' 팥빙수
한 입 먹자마자 욕이 절로 나오던 L사의 팥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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