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는 걸 그리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종종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다. 평소에조용하던 사람이 한번 화나면 불 같이 무서운 것처럼, 먹는 데 관심 없는 사람이 먹는 것에 당기면아무도 막을 수 없다. 지옥 끝까지 가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걸 꼭 먹고야 말겠다. 그런불꽃같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온몸과정신을 휘감는다.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영화 <분노의 질주>에 등장하는 고가의 스포츠카, 혹은 <매드 맥스>의 무장한 트럭처럼 천둥 같은 배기음을 내뿜으며 맹렬히 달려야만 할 때.그러지 않으면 욕망의 불길이 모든 걸 집어삼켜 종내에는 다 타버린 까만 재만 남게 될 터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여름 더위에 지쳐있을 때. 문득 옛날 팥빙수가 먹고 싶어졌다. 여기서 '옛날'식이라고하면, 거칠고 성긴 물 얼음에다 대충 통조림 팥 몇 숟갈 넣고 역시나 통조림에서 꺼낸 후르츠 몇 조각을 뿌리고 어르신들이나 좋아하는 설탕 범벅 색색깔의 젤리를 곁들인 후 연유나 초코 시럽을 듬뿍 친, 그런 팥빙수를 말한다. 아 참. 잊지 말고 빙수 꼭대기에는 후르츠 칵테일 통조림에서 꺼낸 새빨간 체리를 곱게 얹어줘야 한다. 그게 화룡점정이다. 예전에는 시장 좌판이나 동네 빵집 등에서 대충 만들어서 팔던 옛날 팥빙수. 그게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요즈음엔 빙수들이 과하게 정성스럽다. 얼음은 으레 물이 아니라 우유를 얼려서 속이 안 보이는 의뭉스러운 하얀색이다. 숟가락을 갖다 대기만 해도 스르륵 녹아버릴 만큼 입자가 곱기도 하다. 팥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왠지 자연 풍광이 사진집에나 나올 법하게 아름다울 것 같은, 시골에서 올라왔고 유기농이니 협동조합이니 하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떡은 또 어찌나 말랑 쫀득하고 네모 반듯정갈하게 썰어져 있는지. 이 또한 유기농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가운데싸구려 통조림 과일이나 몸에 안 좋은 연유며 시럽 따위는 도무지 낄 자리가 없다. 물론, 이런 빙수는 과한 정성만큼이나 가격 역시 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어딜 가더라도 요즈음의 빙수는 쉬이 찾을 수 있는데 옛날 스타일의 팥빙수는 파는 곳을 찾기 어렵다는 것. 즐겨가는 힙한 카페에는 당연히 없고, 집 근처 재래시장이나 동네 빵집에도 보이질 않고, 그렇다고 직접 얼음 가는 기계며 통조림을 사 와서 해 먹기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내겐불가능한 일이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게 되니 그때부터 옛날 팥빙수에 대한 열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나중에는, 어느 노랫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미치일 듯 싸랑했던 기이억이이 추어억들이이... 죽을 만큼 먹고오오 시이잎다아아", 해졌다. 옛날 팥빙수여, 어디로 가셨나이까. 인간은 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토록 열망하는 것입니까.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러던중.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다. 프랜차이즈 L 햄버거 가게에서 통조림 과일과 젤리가 들어 간 제법 예스러운 팥빙수를 판다는 것 아닌가. 사진을 보니 과연 그럴싸했다. 기억 속의 옛사랑, 아니, 옛 팥빙수와 얼추 닮았다. 그렇다면 당장 L로 달려가자, 고는 할 수 없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아이의 충복으로 전락한 나에게 한낮의 자유란 사치였다. 꼬박 한 나절을 참아내고 아이를 재운 뒤 그제야 밤 산책을 나갈 수 있었다. 집을 나와 지도 앱을 켜서 가장 가까운 L 매장을 검색, 걸어서 20여분 거리의 명지대점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열대야에 땀을 줄줄 흘리며 마침내 도착한 그곳. 잠시 매장 안의 에어컨 바람을 쐬며 열기를 식혔다.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려 온 팥빙수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패스트푸드점은 역시 이름 그대로 신속함이 핵심. 그릇을 들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듯한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는다. 플라스틱 숟가락을 쥔 손이 흥분과 설렘으로 떨려온다. 지금 여기, 한 그릇 옛날 팥빙수를 피우기 위해 간밤에 여름 매미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인상을 보니 왠지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공연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마침내 한 숟갈. 빙수 위에 얹어진 아이스크림과 얼음 알갱이와 팥까지 골고루 퍼서 크게 한 입 먹었다. 느닷없이 입 속으로 들이닥친 얼음 조각들의 냉기에 일순 뒷골이 뻐근하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씹다 삼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했어야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내뱉고 말았다.
"에이, X발."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당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L은 L이었다.그렇다. 이놈들은 새우버거라고 써 놓고선 실은 새우살 함유량이 절반도 안 되는 명태살버거 따위를 팔던 거짓말쟁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엄한 L을 욕할 게 아니다.인터넷에서 스쳐간 출처 불명의 사진 하나만 믿고서 한여름밤의 더위를 헤치며 이곳까지 걸어 온 내가 바보지. 역시 패스트푸드 햄버거집은 B가 최고다. 연유를 묻는다면 이름을 보면 알 것이다. 이름부터 이미 '왕'이 들어가 있잖나.'리아'나 '도널드', '터치' 따위를 압도하는 웅장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토록 먹고픈 옛날 팥빙수를 만나지 못해 머리가 다소 이상해져 버린 사람의 말이다. 그냥 무시하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