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K의 직장생활 중간정산 (1)
서늘한 바람이 코 끝을 간질이는 계절이다. 어느덧 가을의 끝자락을 지나 겨울의 첫 자락을 맞이했다. 아침이면 창으로 스며드는 날선 차가운 공기에 흠칫 놀라 코를 훌쩍이게 된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런 계절이었다. 요맘때 즈음이면 떠오르는 한 시절이 있다.
한창 구직활동에 매진이던 대학 마지막 학기. 짧았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2년 반 동안의 고시생 생활을 접고 취업준비생이 됐다. 취준생은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둘러 남들 못지않은 토익 점수를 만들고, 재수강을 하며 C와 D라는 땟국 같은 성적을 세탁하고, 타의 반 자의 반 인근 사회복지관에 봉사활동을 나가고, 한 편의 성장소설 같은 자기소개서를 썼다. 소설을 잘 쓴 덕일까 필기시험이라면 이골이 난 덕일까, 어렵지 않게 몇 차례의 면접까지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취업에 성공한지라 그렇게 본 면접은 겨우 네댓 번. 몇 안 되는 면접은 대부분 가을이나 겨울 즈음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계절이 되면 왠지 마음이 뜬다. 어두운 색 정장을 차려입고 반짝이는 구두에 단색 넥타이를 한 채 면접장에 앉아있어야 할 것 같다.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다리를 덜덜 떨며 곧이어 호명될 내 이름을 기다리면서.
넥타이, 하니 생각난다. 나는 감히 취준생 주제에 넥타이 매는 법을 몰랐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포인핸드니 윈저노트니 하프윈저노트니 하면서 별의별 방법들이 있었다. 분명 그림과 똑같이 따라 했음에도, 분명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맸다 풀었다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오르고 등덜미에 땀이 나서 와이셔츠가 달라붙고 들숨날숨을 거칠게 씨근덕거리다가, 급기야는 넥타이를 풀어 벽에다 홱 집어 던졌다.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였다. 곧이어 자괴감도 밀려왔다. 나는 스물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왜 넥타이 하나 맬 줄 모르는가. 중학 3년 고교 3년, 도합 6년을 넥타이가 딸린 교복을 입었잖나. 하지만 그땐 고무줄 넥타이였다. 아직 결혼이나 장례식장에 자주 들를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집안 어르신들의 상을 겪지 않았나. 물론 그때도 장례식장 매점에서 파는 검은색 고무줄 넥타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건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나는 나를 위로했다.
위로는 위로고, 당장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면접에 가려면 어떻게든 넥타이를 매는 미션을 해내야만 했다. 방법은 있었다. 하숙집 앞방에 사는 동기 K에게 부탁하면 됐다. 그 친구는 넥타이도 잘 매고, 옷 다림질도 잘하고, 청소와 빨래와 설거지도 꼼꼼하게 잘하는, 내 주변에서 보기 드문 살림꾼 같은 사람이었다. 면접날 아침이 되면 그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넥타이를 건네주며 목을 쑤욱 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내 모습을 보고 오늘도냐, 하는 웃음을 지으며 내 목에 넥타이를 둘렀고 이내 예쁜 매듭을 지어줬다. 그 장면은 마치, 언제 적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일일드라마에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새신랑과 그걸 배웅하는 새댁의 모습 같았다. 넥타이 매듭이 만들어지는 동안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목이 간질거려서 그랬겠지. 나는 간지럼을 잘 타니까. 피식거리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이태원 게이바에 가게 될지도 모르겠군, 하고. 어느덧 둘 다 결혼도 하고 애아빠가 됐으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정작 걱정거리는 현 직장에 면접 보러 왔을 때 닥쳤다. 필기 합격 이후 실무면접이라고 해서 최종면접 전 1박 2일짜리 면접이 있었다. 이놈의 회사는 지금도 그러하듯 예전에도 개판이었던지라 쓸데없이 이틀 동안 면접을 진행했다. 실제 직장 생활에서의 태도를 평가하기 위해 저녁 회식 상황 면접, 혹은 이런저런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구비된 나머지 고작 하루로는 모자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면접자 수 대비 면접관 수가 턱없이 모자라서 면접이 밤늦게 끝난단다. 그렇다면 먼저 끝난 사람은 가면 되지 않나요, 하고 누군가 물었다. 안 됩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소가 외진 곳이라 교통편이 없으니 마련된 숙소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셔틀버스를 타고 귀가하란다. 면접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오전에 들어간 PT는 캐주얼한 복장으로, 오후에 들어간 집단토론은 정장을 입어야 했다. 복장 안내를 받았다. 무채색 슈트, 하얀색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까지 갖춰서. 큰일이었다. 나는 아직 넥타이 맬 줄 모르는데. 그렇다고 K를 캐리어에 넣어 데려올 수도 없었고.
어찌어찌 오전 PT 면접이 끝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후 집단토론 면접 전 환복 시간이 주어졌다. 4인 1실의 숙소 방으로 들어와서 짐 가방을 열어 정장을 꺼냈다. 이제 곧 면접인데 넥타이 맬 줄을 몰라 어쩔 줄 몰라했다. A4 용지에 출력해 온 넥타이 매는 법 그림은 여전히 별무소용이었다. 한참을 그러던 중 어느 나이 많은 형님이 내게 다가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를 내 목에 매어줬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파이팅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고마웠다.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감사의 대답 소리는 데크레센도로 점점 가냘파져 끝마디는 들리지도 않게 허공에 묻혔다. 이번에도 왠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덕분에 집단토론 면접도 무사히 마쳤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네 명. 넥타이를 매어 준 나이가 많던 그 사람, 다른 공기업에 다니는 중인데 이직하기 위해 온 사람, 이름을 대면 모두 아는 일간지에서 인턴도 하고 스펙이 화려했던 사람, 그리고 아직 대학생인 나. 고작 3명을 뽑는데 수천 명이 지원했고 다들 경쟁자였지만, 우리 넷은 밤새도록 이런저런 얘길 했다. 자기소개를 비롯해서 경력, 스펙, 취업 경험담에다가 심지어는 낯부끄러운 연애사까지. 때론 친구나 가족보다는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속내를 털어놓기 더 쉬울 때가 있다.
우습게도 넥타이도 맬 줄 몰랐던 나는 실무면접을 통과했고 마지막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을 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넥타이를 매어줬던 그 사람은 결국 내 동기가 되지 못했다. 거리낌없이 다정함을 나눠줬던 그 사람. 이렇게 될 운명일 줄 알았다면 내 넥타이의 엉망인 매듭 따위 못 본 척했으려나. 왁자지껄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했던 합격자 OT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다정했던 그 사람은 어딘가의 다른 좋은 데 취업했을 거라고, 분명 그랬을 거라고. 그 정도 다정함이면 어느 곳에 가더라도 좋은 말을 들었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그의 손길에 나보다도 더 얼굴에 열이 오르고 그걸 숨기지 못해 들켜버린, 뜻밖의 좋은 인연을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다정하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거나, 자기 걸 챙기기에 유리하지는 않을 테니까. 오히려 바보 소리 듣기 십상이니까. 메마른 요즈음의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는 건 따뜻한 다정함이 아니라 다른, 조금 더 차가운 무언가라고 다들 종용하듯 말하니까.
나는 아직도 넥타이 매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필요할 때면 고무줄이 달린 넥타이의 도움을 여전히 받고 있다. 줄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넥타이를 매는 순간이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종종 떠올린다.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의 다정함을 발휘해서 내 목에 넥타이를 정성 들여 매어주던 때를. 그의 손에서 내 마음으로 전해지던 한 줌의 온기를. 제 살기 바쁜 세상에서 다들 그만큼의 따뜻함을 지니고 살 수 있을까. 대단한 희생이나 봉사나 헌신 같은 뜨거움이 아니라, 그저 남에게 넥타이를 매어주는 그 정도 별것 아닌 한 줌 따뜻함이라도 지녔으면.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은 지금의 세상에서는 어려울 것 같은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