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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n 30. 2020

인생 첫 면접을 삼성전자에서

회사원 K의 직장생활 중간정산 (2)

 월급날도 아닌데 계좌에 회사 명의로 돈이 들어왔다. 달력을 확인해보니 초과수당 지급일도 아니고, 최근에 출장 간 적 없었으니 여비일 리도 없고, 지난달 법인카드 사용 청구액과도 달랐다. 혹시 자녀 출생 신고 자료를 늦게 제출하는 바람에 이번 달 급여에서 누락됐던 가족수당이 이제사 들어왔나. 인사팀에 확인해보니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정체불명의 수입에 뭇하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던 차에 회사 동기들이 모여있는 단톡방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뭔지 아는 사람?"

 "혹시 투쟁의 성과 아니야? 노조에서 주장하던 미지급 수당 소급분이 이제서야 들어온 건가?"

 "너는 재무팀이잖아. 이게 뭔지 모르면 어떡하냐."

 "우리 부서 후배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런 거 받은 적이 없다는데."

 "그저께 들어온 월급 다시 확인해 봐야겠. 계산이 잘못됐나 본데."


 한참이나 의견이 분분했는데 동기 P가 해답을 구해 왔다.


 "오늘 돈 들어온 거, 우리 10년 근속 기념 수당이랍니다. 말도 없이 넣어주네."


 그러고 보니 밥벌이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나 됐다. 스물일곱에 입사하고 퇴사와 이직 없이 주욱 다녔으니 말 그대로 청춘을 바친 셈이다. 신입이었을 적엔 삼삼오오 모여 허구한 날 회사 욕을 하고, 꼰대 같은 선배들 비난에 열을 올리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투성이 직장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열정을 불태우면서도, 여기 말고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자면서 마음 맞는 몇몇과 몰래 스터디도 하고 그랬는데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 우리도 이젠 마냥 선배 세대 탓을 하며 어리광 부릴 수가 없는 나름 중 사원이 되어버렸다.


 연차가 제법 쌓인지라 몇 해 전부터는 채용 시즌에 종종 자기소개서 서류 평가에 참여하고, 필기시험 문제를 출제한다거나, 면접관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지원자들을 볼 때마다 나 역시 똑같이 겪었던 구직 활동의 그때가 떠오른다. 특히 날카로운 첫 면접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한참 전의 일이라서 왠지 "라떼는 말이야", 라고 운을 띄우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10년 전 겨울 즈음이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Winter is coming'. 몸도 마음도 겨울처럼 추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도 있는 신림동 고시생 생활을 때려치운 후 맞이하는 첫 겨울. 몇 년 간 고시 공부만 했던 터라 취업의 세계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존 스노우처럼 'I know nothing'인 상황이었다. 백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서 취업 준비를 다. 부랴부랴 난생처음 토익 시험이라는 걸 보고, 에이스급 투수의 방어율 같던 학점에 한숨을 쉬며 재수강할 과목들을 정하고, '취업 뽀개기' 같은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이런저런 회사들의 채용 일정을 확인 후 달력에 메모를 하면서, 동시에 그동안의 인생 역정이라고 할 만한 게 이렇게도 없었나 자아 비판을 해 가며 한 편의 소설 같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그 와중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인복지관에 봉사 활동까지 다. 제법 빠른 속도로 고시생에서 취업준비생으로 태세 전환을 한 셈이다. 그 시절의 나는 성실하고 행동이 재빨랐다.


 어사화를 쓰고서 합격의 기쁨을 누린 뒤 고위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은 글렀다. 대신에 대기업에라도 들어가야지 싶었다. 여기저기에 지원서를 넣던 중이었는데 마침 삼성전자 겨울 인턴 모집 공고가 떴다. 1등 기업에는 당연히 지원해 봐야지. 곧바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나름의 합격 전략을 짰다. 삼성 입사 필기시험인 SSAT(삼성직무적성검사. 지금은 GSAT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그동안 공부하던 행시 1차 시험인 PSAT과 비슷했다. 일반 상식 과목만 하나 늘어났을 뿐. 시험은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면접이 문제. 경영학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술이 있는 공대생도 아니고, 일반 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와는 거리가 먼 사범대 출신으로 나의 어떤 점을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대기업이면 당연히 사회공헌 팀이 있을 테니까 그동안의 봉사 활동과 노래패 동아리 공연 경험, 행시 2차 과목 때문에 공부했던 경영학의 조직 관리 이론 지식 등을 적절히 포장해서 얘기하면 어떻게 한번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돌이켜보니 대기업 입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예상대로 SSAT는 쉽게 통과했다. PSAT도 세 번이나 통과했는데 SSAT 따위야 뭐. 재수 없어 보였겠지만 시간이 남아서 남들 보란 듯이 엎드려 잠을 청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필기 합격자 발표 후 곧바로 면접 일정이 잡혔다. 내 인생 첫 취업 면접이었다. 가리봉동(지금의 가산디지털단지. 여담이지만, 전철을 타고 가는데 어르신들 몇 분께서 가리봉역이 어디로 간 거야. 뭐가 이렇게 어려운 이름으로 바뀌었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라며 정부 욕을 하고 있었다) 의류 아울렛 매장에 가서 싼 값에 검은 정장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마련했다. 인터넷에서 찾아 본 그림을 따라 하면서 넥타이도 매 봤다. 분명히 그림 그대로 따라 했는데 내가 만든 넥타이 매듭은 엉망진창이었다. 평소에 넥타이 맬 일이 있었어야지 원. 한참을 맸다 풀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포기. 앞방에 살던 친구 K가 대신 매어 준 넥타이를 귀한 신줏단지 모시듯 그대로 모셔 와서 면접날 아침에 목만 쑤욱 집어넣고 매듭을 조였다. 정장이 구겨지기라도 할까 봐 버스에서는 자리에 앉지 않고 한참을 서서 갔다. 면접장은 서초동에 있던 삼성전자 본사였다.


 드디어 시작된 면접. 처음이라 그런지 버벅거리면서, 마치 황소개구리가 볼에 잔뜩 바람을 넣어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이십여 년 남짓한 나의 인생사를 한껏 과장해서 뽐내고, 그동안 전혀 관심 없었지만 귀사에 대해 참으로 잘 알고 있으며 계속해서 애정을 가져왔고, 향후 이 기업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등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참이나 쏟아냈다. 하도 긴장해서 그런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 뒤 면접관들이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하고픈 말을 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착한 기업이니 사회 공헌이니 CSR이니 하는 내용을 많이 공부해서였을까, 내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에버랜드 전환 사채 발행 등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같은 일은 지양해야 합니다. 오너 리스크 따위에 발목 잡히지 않고 지속 가능한 경영으로 나아가야 앞으로 삼성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전환 사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얼굴로 피식하더니 딱딱하게 굳어버리던 면접관들의 표정. 분명 난방이 따뜻하게 잘 된 면접장이었는데 어디 창문이라도 하나 열린 듯 불어오던 한 줄기 싸늘한 겨울바람이 느껴졌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몹쓸 주둥아리는 한참이나 나불거렸다. 당연히도 마지막 발언 때문은 아니겠지만 (수차례의 면접 지원과 면접관으로서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붙일 사람에게는 굳이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 해 보세요", 따위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면접 결과는 탈락이었다. 불합격 통보 문자를 보면서 혼자서 위로했다. 나는 이 불합리한 자본주의 사회, 삼성 공화국의 나라에서 저항의 횃불을 치켜든 거다. 삼성이 1등 기업이면 뭐하나, 사회에 보탬이 되는 회사에 다녀야지 이러면서. 그래도 대기업이라 그런지 정직원도 아닌데 인턴 면접비를 5만 원이나 주길래 그래도 1등 기업은 다르네, 참 고맙다는 생각 들었다. 돈 앞에 장사 없었다.


 문제는 다음 면접도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두 번째 롯데백화점 면접다. 이번에도 마지막으로 이 회사에 대해 평소에 느낀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았다. 건망증 심한 주둥아리가 또다시 경을 쳤다.


 "정말 솔직하게 얘기해도 됩니까?"


 기억하기론 그때, 신세계백화점에 비해 롯데백화점은 다소 '더러운 느낌'이다, 백화점의 고급스러움보다는 도떼기시장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따위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 탈락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면서요. 경쟁사 대비 다소 떨어져 보이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요. 취업준비생 치고 아직 배가 덜 고팠었나 보다.


 세 번째였던 SBS 기자 면접에서도 쓸데없는 말의 행렬이 이어졌다. 역시나 말을 뱉어내고선 아차, 하고 후회를 했다. 이쯤 되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의도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래도 뉴스는 MBC가 최고 아닙니까?"


 그땐 그게 사실이었다. 뉴스 신뢰도는 JTBC가 아니라 MBC가 가장 높았던 때다. <뉴스데스크>와 <PD수첩>, <시사매거진 2580>의 예리한 비판 정신이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지난 정권들을 거치며 회사가 엉망이 되긴 했지만서도. 여하튼 그런 생각은 마음속에서만 힘차게 외치면 됐지, 굳이 SBS 면접장에서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이후로도 몇 번의 좌충우돌 끝에 다행히도 지금의 회사에 합격했다. 그리고 10년째 지겹지만 성실하게 다니면서 밥벌이를 해결하고 있다. 마지막 면접 합격의 비결은 최대한 조직에 화합할 수 있는 온순한 양처럼 보이게 얌전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신입의 당당한 패기와 신선함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그 미묘한 균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수 차례 탈락의 고배 끝에 배가 고파지니 결국 '기업이 원하는 인간'으로 변모하게 됐던 10년 전의 나였다.



그땐 한 손에 커피잔, 다른 손에 서류 봉투를 들고서 바쁘게 뛰어가는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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