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김동률이 오랜만에 신보를 냈다. '산책'이라는 제목의 싱글이었다. 여전한 김동률표 발라드를 들으며 예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의 15사단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니,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화천은 6월 초여름에도 아침저녁이면 겨울처럼 싸늘했다. 하아, 하고 숨을 내뱉으면 허연 입김이 눈에 보일 만큼 추웠다. 하지만 한낮에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흘렀다. 산악 지역이라 태양에 조금 더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가. 사납게 내리쬐는 햇빛은 한 달 새 우리 모두의 얼굴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공익근무요원이라 현역병들과는 달리 고작 4주 동안 머물렀을 뿐인데 아직도 그곳의 더위와 추위가 종종 생각난다.
처음 며칠간은 나남 할 것 없이 어리바리 정신이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매일 밤늦도록 서야 했던 불침번, 새벽마다 귓가를 때리는 기상나팔소리, 오른발 왼발과 오른팔 왼팔이 따로 놀게 되는 행진, 사람에게 왜 이런 고통을 안기는지 알 수 없던 PT 8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나서 놀랐던 사격, 각을 딱 맞춰 정리해야 하는 모포와 옷가지들, 악을 쓰며 소리 질러야 하는 군가와 관등성명, 분명 첫째 날엔 맛이 없었는데 점점 먹을 만해지던 군대 급식까지. 하나같이 생경한 것들 투성이었다.
어느새 3주가 지나고 이제 슬슬 이곳 생활도 익숙해졌을 즈음. 식당에 갈 때마다 틀어놓은 노랫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왜 이게 안 들렸을까, 매일 같은 노래 한 곡을 되풀이하며 틀어댔었는데. 몸과 마음에 여력이 생기니 그제야 귀가 열린 것이었다. 순번을 기다리며 줄지어 앉은 채로 노래를 들어보니 김동률의 목소리였다. 담담하지만 처연한 목소리로 "그건 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라는 구절을 반복하는 노래. 대체 왜 최신 가요나 걸그룹 노래도 아닌 이런 곡을 트는 걸까. 의아했는데 이내 궁금증이 풀렸다.
식당 앞 의자에는 병사 하나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앉아 있었다. 군복 어깨에 작대기 네 개 계급장이 달려있는 걸 보니 병장이었다. 그는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때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러다가 일순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옆에 서 있는 상병인가 일병인가는 '저 양반 저거, 또 시작이네.'라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누가 보더라도 이게 하루 이틀 반복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김동률의 노랫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그건 아마도 병장의 (전)여친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일 거라고 추측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주 간의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를 찾아봤다. 검색창에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라는 가사를 치고 엔터를 누르니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김동률 4집 <토로>의 두 번째 트랙 '사랑하지 않으니까요'였다. 그냥 나의 손을 잡고 한참 울면서 끝내 아무 말이 없다가 잘 모르겠다고, 왜 이러는지... 그건 아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노랫말을 읽고 들으며 한 장면을 떠올렸다. 말년 휴가를 나간 병장이 애인을 만난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녀는 말이 없다. 데려다주던 집 앞에서 결국 어렵게 꺼낸 말.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병장은 제대하는 그날까지 매일 식당에서 울먹였을까. 민간인으로 돌아간 후에 자기를 사랑해 주는 다른 누군가를 찾았을까. 이후로는 김동률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 흘리지 않게 되었을까. 이번에 나온 신곡은 들어 봤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진은 김동률이 있던 그룹 전람회의 1집 앨범 LP판. 회현 지하상가 중고숍에서 5만 원 주고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