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연애를 시작할 무렵인 2008년 5월부터 날짜를 따져보면 벌써 12년 차가 되는 기념일들 중의 하나이며, 우린 1월 2일에 결혼했기에 1년 중 가장 먼저 맞이하게 되는기념일이었다.새해 축하를 하자마자 곧이어 결혼을 축하하게 된다.
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배가 한껏 부풀어 오른 임신부 아내와는 함께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창궐한 때라서 근사한 풍경의 이국어딘가로 여행을 가기에도, 입덧 때문에 음식을 가리게 되니 멋진 레스토랑을 가는 것도, 괜히 태교에 좋지 않을세라 신경이 많이쓰이는 이벤트 따위를 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도 마땅찮은 게 없었다. 그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대체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역시 편히 쉬는 게 최고지, 라는 생각에새해 첫 주말을 남산 그랜드 하앗트 호텔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남들 다 하던데 우리만 아직 못해 본 '호캉스'라는 걸 우리도 한 번즐겨보자.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도대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멀쩡한 자기 집을 놔두고 왜 호텔까지 기어 들어가서 굳이 잠을 자는지. 이번에야말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
실은 그 해답 중의 일부분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긴 했다. 주변 사람들 중 서울에서도 호텔, 강원도나 제주, 심지어 해외 여행을 나가서도 오로지 호텔에서만 며칠을 보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으니까.
"OO씨, 여행은 그렇게나 자주 다니더니 호캉스를 아직도 안 해봤어? 아직 애가 없어서 그렇구나. 애기하고 호텔에서 쉬는 게 최고야. 유명한 관광지니 액티비티니 풍경이니 그런 거 다 필요 없다니까. 애 낳아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걸. 애들은 호텔 수영장에 아주 환장한다니까."
오랜만에 차를 달려 강변북로를 지나 이태원으로 향했다. 블루스퀘어며 해밀튼 호텔 같은 한때 익숙했던 장소들을 지나가니 괜스레 반갑다. 이태원 거리를 걸을 때 콧속에 들어오던 케밥 냄새 되게 좋아했었는데. 경리단길을 따라 경사진 도로를 한참 올라가면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하얏트 호텔 입구가 나온다. 그동안 종종 이곳의 카페나 뷔페에 들른 적은 있었지만 숙박하러 오는 건 처음이다. 서울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여행 갔을 땐 하얏트에 몇 번 묵어보긴 했지만서도.
객실은 '클럽룸'을 예약했는데 이 방은 숙박뿐만 아니라 조식과 석식도 방 값에 포함되어 있고 체크인 때는 간단한 웰컴 다과를 준다. 일반 객실과는 체크인 장소도 다른데 여기에서부터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반짝이는 장식, 맛있는 음식, 친절한 미소, 정갈한 물건들과 우아한 분위기까지. 이 모든 게 우리를 위해 주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가'만 지불할 수 있다면 삶이 이렇게나 풍요로워질 수 없다. 객실은 18층 남산뷰였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실감했다. 창 밖 왼쪽에는 도시 전망, 오른쪽에는 남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눈을 호강시켜 준다. 늦은 밤, 불빛이 몽글몽글 맺힌 서울 야경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맥주 한 잔과 재즈를 즐기고 있자니 세련된 도시 남자가 된 듯했다. 첫째 날 푹 쉬고 나서 둘째 날 아침엔 평소엔 죽어라 하지 않던 운동을 기어코 하겠답시고 피트니스 센터로 내려갔다. 집에서는 주말에 어떻게든 더 자려고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하는데, 이상하게도 여행지나 호텔방에서는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음에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지게 된다. 운동을 마치고 사우나까지 끝내고 정성스레 차려진 조식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왠지 부지런한 사람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그렇게 1박 2일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호캉스를 즐겨 보니 '완벽한 해방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프리덤!"을 외칠 만했다. 지긋지긋한 집안일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의 번잡한 모든 것들과의 완전한 이별. 귀찮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손에 대지 않은 채 모든 걸 누군가가 대신해 주는 편안함을 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의 이불을 개는 것도, 샤워하고 머리를 말린 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청소기를 돌릴 일도, 무얼 먹을지 고민하다가 힘들여 요리를 해서 먹고, 먹은 후엔 설거지를 하고 식기를 말리는일련의 과정도, 맥주 안주로 먹는 과자 부스러기를 바닥에 흘릴까 봐 조심해야 할 필요도, 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갔다가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뗀 표정으로 방이 깔끔하게 마치 새 것처럼 정리되어 있으니까. 가사 노동이라는 건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매일같이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일상의 삶이라는 깊은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반복의 일시적 중단에서 느껴지는 안락함과 해방감이 이렇게나 컸다.
비단 무한대로 반복되는 집안일에서의 탈출만이 다는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상호 작용의 중단'도가뭄에 단비 같은 시간을 선물해 줬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당연하게도 여러 개의 가면을 골라서 써야 하고, 작용이 오면 반작용이 필요하며, 아무 소통 없이 개인 작업만을 하는 회사라 하더라도 하다못해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다른 이들과 눈인사 정도는 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니까. 그런 피곤함이 쌓여서 도저히 못 견딜 정도가 되면 휴가 쓰고 집에서 쉬지, 굳이 호텔까지 갈 필요가 있나 싶지만 집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옆집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적당한 미소를 띠며 인사하고, 그 이웃분께서 강아지라도 끌고 나왔으면 "아이, 귀여워라." 같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마디는 해야 한다. 그게 사회 구성원의 올바른 자세라고 하니까. 집과 호텔은 달랐다. 여기에선 모든 사람들이 손님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익명의 군중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그곳에 파묻힌 채 그동안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들였던 노력을 중단해도 아무 걱정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마주친 사람들을 밖에서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예 마주치지 않고 싶었다면 집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호텔에서 묵을 걸 그랬나 보다.
호텔방에서 보내는 늦은 밤엔 잊고 살았던 '취향의 재건'까지 덤으로 얻었다. 뷔페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아직 겨울이라 운영 중인 아이스링크장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상권이 많이 죽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 경리단길 산책도 하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는 반짝거리는 불빛들과 초록색 불이 들어온 남산타워가 보였다. 아직 잠들기 아쉬워서 도시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에 제리 멀리건의 쿨 재즈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잃어버렸던 내 안의 도시적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아아,그랬었지. 나도 소싯적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서 와인과 재즈를 동경하던 문학청년이었는데 어느새 소설책 한 권도 끝까지 읽기 버거워하는 직장인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늦은 밤의 호텔방이었다. 기껏해야 하룻밤이면서 나에 대한 여행까지도 떠나게 된다. 실은 이런 생각은 집에서도 늦은 밤, 홀로 앉아 술 한 잔을 벗 삼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호텔 객실에서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느낌일 게다. 감성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싶다가도 어느 순간 눈에 띄인 어질러진 옷가지나 미처 정리 못 한 서류들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다시금 현실의 바닥으로 끌려 내려올 테니까.
체크아웃을 마치고 호텔을 나오면서 돌이켜 보니 흑백으로만 채워져 있던 일상의 화면에 총천연색 물감을 터뜨리고 뿌려서 보낸 듯한 이틀이었다. 일상의 순간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알록달록한 장면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늘 보던 색깔이니 비슷함의 반복일 수밖에 없고, 그 끊임없는 반복은 결국 일상의 삶의 빛깔을 바래게 했을 거다. 그에 비해 불과 이틀이었지만 호캉스의 날들은 일상의 삶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색깔이었다고 기억에 남을 듯하다. 마치 낯선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의 기억이랄까. 하긴 호캉스도 형태는 다를지라도 일상에서의 도피라는 목적은 여행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이 멀쩡한 집 놔두고 굳이 호텔에 가서 자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이해가 가면서도 왠지 슬퍼졌다.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공들여 계획을 짜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가며 차곡차곡 짐 가방을 싸고, 몇 날 며칠의 휴가를 내서 마침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시간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곳에라도 떠나야겠다는 '차선책'이 결국 호캉스라는 결과물 아니었을까 싶어서다.하지만 그만큼의 여유도 없는 이들에게는 호캉스조차도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동경의 대상이겠지만. 배부른 투정이다.
종종 아내와 함께 호캉스라는 걸 즐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물론 낯선 곳으로 둘이서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더욱 좋고.그런데 여행 가서까지 굳이 좋은 호텔에서 묵을 지는 모르겠다.선물에 선물을 얹어 받는 것 같으니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통신사 카드 중복 할인 따위는 안 되잖나.
이건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호텔방 창 밖 야경. 삼각대나 셔터 릴리즈도 없이, 게다가 감도 200짜리 필름으로는 도저히 야경 사진을 찍을 엄두를 낼 수 없는 게 필름카메라다.그나저나 요즘 스마트폰은 카메라가 어찌나 좋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