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다. 봄이 한창 피어나고 있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1980-90년대에는 사월이 되면 방송 같은 데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싯구를 인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달리 말해, 적어도 그 시절에는 이 구절이 우리 사회에서 사월과 좀 습관적으로 연관되는 언어 자원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을 거듭 들으면서도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그 뜻이 무엇인가 궁리를 해보지는 않았다. 또 이 말이 T. S. 엘리엇이라는 시인이 쓴 “황무지”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어리고 게으른 나는 이 시를 찾아 읽어보지는 않았다.
대학 2학년 때인가 사월 초 어느 맑은 오후 한 영문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이 구절을 언급하시면서 그 뜻을 풀이해주셨다. 아름다운 사월의 자연을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해 마음이 슬픈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이 지긋하신 영문학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이런 해석이 그렇게 흥미롭거나 감명깊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은 엘리엇이 1922년 발표한 434행 장시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첫머리에 나온다. 어떤 문맥에서 이 말이 등장하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Memory and desire, stirring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겨울은 우리를 따듯하게 했다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마른 구근으로 생명을 조금 먹여주었다.
이 구절을 보면 맨처음에 사월이 가장 잔인함을 말한 다음 계속 그 이유가 됨직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란 사월의 봄이 겨울의 죽음, 둔감, 망각 등으로부터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해 봄과 함께 새로이 찾아오는 생명의 약동이 겨울의 정체와 미미한 생명력에 익숙한 우리를 뒤흔들어 불편하게 하므로 봄이 아주 잔인하게까지 느껴진다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위 구절에서 이런 첨예한 마음의 불편함을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표현이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가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기억과 욕망은 무엇에 대한 기억과 욕망일까? 이 두 가지 가운데 나는 욕망의 성격이 더 먼저 이해된다. 우리가 봄에 자연의 생명이 새로이 깨어남을 보면서 느끼는 생명의 욕망, 곧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을 뜻하는 것으로 얼른 생각된다.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생명을 한껏 누리려는 욕망과 “뒤섞”이면서 우리 마음을 괴롭게 하는 기억일 것이므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자신의 삶을 기억할 때,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 역사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인간의 소망과 의지와 노력이 좌절되고 무위로 돌아간 경우를 쉽게 만나게 된다. 기억과 욕망이 뒤섞인다는 것은 욕망과 이 욕망이 충족될 수 없다는 앎이 충돌하고 갈등한다는 뜻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겨울에 우리는 기억도 욕망도 모르는 망각에 머무를 수 있었고, 이 망각 속에서 겨울은 사실 “따듯한” 계절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망각하게 했던 “눈”은 늘 우리를 보호해줄 수 없다. 눈은 시간이 지나면서 녹을 수 밖에 없다. 이제 봄을 맞아 우리는 기억하고 욕망하게 된다. 망각의 안온함이 사라진 이런 봄은 겨울보다 냉혹한 계절이다.
어쩌면 우리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는 이미 이런 갈등과 모순이 상존하고 있는 것도 같다. 또 이와 관련하여 우리 의식 가장 깊은 곳에는, 욕망이란 많은 경우 실현되지 않으므로, 오히려 욕망이 성취되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에 편안함을 느끼는 성향도 있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는 욕망이 다 성취되는 것에 역설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본능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 그 풍족함 가운데에서 가끔 원인모를 불안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가? 히브리 성서 <전도서>에는 인간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그 다음에 깊은 허무를 느끼는 사람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다.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전도서>의 허무를 예로 들면서 사람은 자기 욕망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충족시켰을 때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서정주가 쓴 짧은 시 “봄”에도 이러한 완벽에 대한 불편함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색 비 무쳐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이 시에서 화자는 봄의 자연에서 느껴지는 완벽한 생명력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럴 때에 자기 몸이 어딘가 아픈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고, 만약 그렇지도 않다면 슬픈 일이라도 생겨 새 봄의 충일감과 행복감에 균열이 생기기를 바란다.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동시에 욕망이 다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인간, 또 이 때문에 욕망이 남김없이 실현되는 것이 두려운 인간. 새로운 생명의 약동이 시작되는 봄은 이렇게 모순된 인간의 마음이 우리 자신에게 가장 선명하게 의식되는 계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