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이기심에서 그러면 안됩니다. 마음을 쏟아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두배로 고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을 털어놓을수록 한 사람과 가까와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인간이 가까와지는 데는 침묵 속의 공감이란 가능성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삼중당문고, 홍경호 역, 134 일부 수정)
밑줄 친 '순수한 이기심에서 그러면 안됩니다'라는 문장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순수한 이기심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달리 말해, 순수한 이기심이 아닌 다른 동기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2) 순수한 이기심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순수한 이기심에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이 가운데 작품에서 의도하는 뜻은 (2)라고 본다.
Man soll nicht über sich sprechen, aus puren Egoismus nicht, denn wenn man sein Herz ausgeschüttet hat, bleibt man ärmer und doppelt einsam zurück. Es ist eine Illusion zu glauben, daß man einem Menschen um so näher kommt, je mehr man ihm anvertraut. Ich glaube, es gibt keine andere Möglichkeit der Nähe als die schweigende Übereinstimmung. (106)
니나의 이런 말씀은 일종의 무위 철학 또는 수동성의 철학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여기에서 니나가 말하는 공감은 깊이있는 공감, 본질적인 조화를 뜻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공감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한 건 아니다. 어떤 두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이런 공감에 이르려면 원래부터 이들이 성향이 같거나 어떤 강렬한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 조건이 있을 때 이러한 근원적인 공감은 말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부터 아무 말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공감의 방향으로 떠밀어주는 최소한의 언어가 필요할 것이다.
가장 깊고 중요한 공감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식과 의식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자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달리 말해 우리의 의식에는 자신과 본질이 같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알아보고 다가가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때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 찾아오는 것인 듯 하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을 찬찬히 살펴볼 때, 비록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마지막에 이해가 되는 그 순간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이해에 도달하는 마지막 도약의 경험을 "받기" 위한 조건형성일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순간의 도약은 누가 또는 무엇이 선사하는 것일까? 그(것)을 신, 자연, 진리, 진정한 나 등등으로 명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